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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고향 마을 하마루 [321] 본문
최인태의 세상이야기 T 스토리입니다.
방문해 주신 모든님들 께 감사드립니다.
하마루에는 네갈래 길이 있다.
경천에서 나올때는 다리 건너서 왼쪽으로 꺾여 있었다.
주변의 농지가 경지 정리되면서 굽은 도로가 지금의 북쪽으로 약 50m 이전 설치되었다.
사거리에서 상성리 넘어 가던 고갯길도 동시에 이전 설치되었다..
고갯 마루에는 항아리를 만드는 가마가 설치되어 크고 작은 항아리를 생산하였다.
부근에는 작은 규모의 천주교 공소 건물이 있었다.
지금의 건물은 도로확장 공사관계로 이전 확장 되었다.
공주군 계룡면 화헌리는 법정 동리 이름이다.
우리는 이곳을 하마루 또는 화마루라고 불렀다
화헌리이며 하마루, 화마루는 각각의 전설이나 유래가 있다고 한다.
하마루는 영규대사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금산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고 이곳 하마루에서 숨졌다고 한다.
그후 이곳을 지나는 말들의 발굽이 땅에 붙어 떨어지지 않아서 모두 내려서 걸어갔다고 한다.
말에서 내린다 하여 하마루[下馬樓]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다름 이름으로 화마루[火]마루가 있는데 이는 점고개 마루에 위치한 옹기가마에서 불을 붙이면 불꽃이 보인다해서 유래했다는 설[說]이 있다.
화헌리의 호미씻기는 농부들이 두렛일의 마지막날 하던 민속놀이다.
호미씻기 놀이는 여름 농삿일의 고된 작업중 하나인 논매기에 사용하던 호미를 올해는 더 쓸일이 없어 씻어 보관한다는 의미이다.
화헌리의 들이 넓고 농경지가 많은 지역임을 말해주고 있다.
화헌리 앞뜰에는 월암천[月巖川]이 흐르며 똘애미 쪽으로는 월산천[月山川]이 흘러 젖줄의 역할을 하고 있다.
화헌리에는 화산영당[華山影堂]이 있으며 이곳은 정규한[鄭奎漢 1750~1824, 본관은 장기 정씨이다]] 선생의 사당이 있다.
선생은 송환기[宋煥箕]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1780년[정조 4년]과거에 급제하였으나 관리로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다음 백과에는 화산영당의 위치와 주소가 잘못 기재되어 하루 빨리 고쳐져야 할것이다.
계룡면 화헌리를 화은리로 표기 하였는데 화은리는 북쪽으로 약 10km 이상 올라 가야한다.
같은 계룡면에 화은리와 화헌리가 23번 국도변에 위치하고 혼동하지만 법정동리가 다른만큼 보완이 필요하다.
선생의 후손으로 잘못을 바로잡기를 기대해본다.
천주교 4대 박해 사건을 되짚어 본다.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
하마루 4거리에서 상성리 넘어가는 고갯길에 옹기[항아리] 그릇을 만들고 굽는 가마 2기가 있었다.
이고개는 작은 언덕배기이며 우리는 점, 또는 충청도식 발음으로 즘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당시에는 만들어진 항아리를 산더미 처럼 쌓아놓았으며 길건너에는 그릇에 원료가 되는 진흙이 쌓여있었다.
화헌리의 천주교 공소가 고갯마루에 남아있다.
조선의 천주교 박해 시절에 천주교 신자들은 산속에 숨어서 교우촌을 이루고 옹기업에 종사하였다.
옹기 장수로 위장하여 옹기를 팔러 다니면서 동료 신자들을 방문하고 돌보았다고 한다.
훗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이 만든 옹기장학회도 이러한 역사에서 따온것이다.
어린 시절은 경천에서 자라면서 이곳 옹기즘을 구경도 하였다.
청년이 되어 경기도 평택으로 이주했다
지금의 평택시 통복동 산비탈에 옹기 가마가 2곳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자세하게 구경하였으며 친구의 선친께서 옹기 장인으로 항마리를 직접 만들고 계셨다.
그런데 일요일이면 모두가 일손을 놓고 한곳으로 가셨다.
비전동에 재랭이 고개마루에 위치한 성당이였다.
한국 천주교에서 옹기는 아주 특별한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무자비한 박해를 피해 산으로 숨어든 신자들은 생계를 위해 옹기나 숯을만들어 내다 팔았습니다.
오래된 옹기의 뚜껑을 열어보면 십자가 문양이 그려진 게 있습니다.
십자가 문양이긴 하지만 알아볼 수 없도록 x자를 쓴것 처럼 그리거나 지그 재그로 그렸답니다.
또는 둥근 용수철 모양에 십자가 모양을 숨기기도 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아호가 옹기였습니다.
선교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김 추기경의 부모도 옹기 장사를 하며 전교 활동을했습니다.
그후 장학회 이름도 옹기 장학회로 하였답니다.
화헌리 또는 하마루,화마루에서 상성리 방향으로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옹기 굽는 가마 2기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 경천에 살던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다 가마에서 시뻘건 불길이 치솟는 장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가마 입구를 막지 않고 계속 땔깜을 집어 던지고 있었다.
옹기의 가마는 기어가는 지네 모형으로 위쪽이 높아서 불길은 무섭게 타오른다.
한동안은 가마의 양쪽에 작은 구멍을 열어 놓아 그곳에도 불길이 보였지만 어느 정도 온도가 오르면 구멍부터 서서히 닫기 시작한다.
아마도 하룻밤이나 이틀밤 정도 쉬지 않고 불을 넣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직접 옹기를 만들거나 아는 사람이 없서 상상으로 적어본다.
가마 입구까지 완전하게 밀봉한후 하루 이틀 식을때를 기다린후 잘 구어진 이제부터는 옹기[甕器]로 이름이 바뀐다.
대부분이 그시절에는 토기에 질그릇에 유약을 발라 반짝 반짝 빛나는 항아리 즉 옹기가 되어나온다.
우리는 항아리 만드는곳을 즘[점,점말,점천]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고향의 친구들과 대화할 때는 야 그 즘 말이야 아직도 그자리에 있냐하고 말입니다.
월곡,상성,죽곡리 친구들은 그 즘 앞으로 걸어서 등하교를 하였다.
내가 고향을 떠나던 해는 1971년 4월초였다.
경천에서 하마루 차부까지 가방 하나 들고 걸어야 도착한다.
그런데 경천 변전소를 지나 다리가 보이려하는데 저 아래 상월 근방에서 뽀얀 먼지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서울행 버스 달려 오는 모습이다.
저 버스를 놓치면 몇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먼지가 보이기 사작하면 달려야 한다.
일단 차부에서 버스 표를 끊어야 한다.
버스표를 매표해서 차장에게 보여 주면서 탑승을 할수가 있다.
차표 한장을 팔면 차부집에서 약간의 수수료를 벌기 때문이다.
하마루 사거리 윗집은 서울이나 공주 방면의 표를 살수가 있다.
반대로 논산이나 상월 방면은 아랫집 차부에서 매표를 해야합니다.
당시는 금남여객,삼흥여객으로기억합니다.
제가 하마루에서 버스를 한번도 안탔을때는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는 버스에 타기만 하면 공주로 대전으로 서울로 간다니 놀라울뿐이였지요.
사거리가 있는 하마루 그리고 논산 방면으로 길가의 집이 보이는 곳은 시루뫼라고 불렀다.
모퉁이를 돌아 논가운데 가다보면 월산천의 다리가 보인다.
이 다리는 공주군과 논신군의 경계에 있다하여 우리는 군계 다리라고 불렀다.
지금은 지명이 변해서 다른 이름으로 월산교라 부른다.
23번 국도가 상성리 방향으로 옮겨가서 2차선으로 남아 있다.
월산교 근처의 지명이 똘애미 또는 또래미라고 부르고 있다.
북쪽 방향으로는 금띠 마을과 맞닿은 지명은 샘말이라 부른다.
샘말에 내려보면 월암천이 흐르는 곳의 넓은 들은 산정들이라 부른다.
인근의 농지는 경지정리가 완료되어 바둑판 모양으로 논농사와 비닐 하우스 농사를 하고 있다.
둥구나무가 있는 농협 창고 마당에서는 늦 가울에 벼 수매를 받았습니다.
집집마다 벼를 탈곡해서 잘말린후 가마니에 담은후 새끼줄을 이용하여 가로 세로로 단단하게 고정하여야 합니다.
가마니의 무게 역시 정확해야 하구요.
이것은 정부의 양곡수매 사업입니다.
당시에는 아마도 군량미 확보 차원일겁니다.
농부들은 이렇게 해야 그나마 목돈이 들어 온 답니다.
그런데 논이 있어야 벼를 수매하지요.
대다수의 농부들은 이날을 남의 일로 구경만 했을 겁니다.
정부 수매용 벼를 생산하는 집이 많지 않았거든요.
하마루의 어린 시절 추억이 생각납니다.
명절 며칠전부터 서울에서 내려오는 가족들을 마중나갑니다.
당시에는 전화가 없어 언제 정확히 내려오는지 알수 없지만 대충 날을 잡아 하마루 사거리에서 밥도 굶어가며 기다립니다.
저에게는 막내 숙부님이 계셨구요.
바로 위에 형님 그리고 누나 두분이 계셨습니다.
추석의 경우는 날씨가 춥지도 덥지도 않아 좋았지만 소가 먹을 풀을 준비해 놓아야 합니다.
토요일이나 일요일 날은 여유가 있어 괜찮았는데 평일에는 조금 힘들었습니다.
형제나 가족들이 내려오면 반가움도 있지만 우선은 선물을 사오거든요.
별것도 아닌 과자 몇봉지가 전부였지만 말입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과자는 해태제과의 샤브레입니다.
막내 숙부님이 사오셨는데 세상의 달콤함이 모두 여기에 깃들은 맛이였답니다.
형이나 누나들도 사탕이나 과자는 꼭 들고 오셨습니다.
우리집은 4분이 각각 도착을 하기 때문에 집에 도착하고 다시 하마루까지 나가봅니다.
그날 내려오지 않으면 다음날에 다시 가구요.
하마루 차부집 평상에 앉아 있으면 저 위의 금띠 마을에서 먼지가 보입니다.
그러면 차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문제는 버스만 다니는게 아니라 화물차도 다녀서 실망을 하기도 한답니다.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가 몇 시간후 하마루에 도착하면 버스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달려가서 버스 문앞에 줄을 서서 바라보지만 우리 가족은 아무도 내리지 않습니다.
다른집은 양손 가득 선물 꾸러미가 있는데 너무 부럽습니다.
자주 다니지는 않았지만 명절에는 그래도 버스의 배차 시간이 짧았던것 같습니다.
오늘은 누가 꼭 올것 같아 일찍 나왔는데 아무도 안오네요.
점심때가 지나니 배가 고파옵니다.
그래도 과자를 생각하면 힘이 나고요.
기다린 보람의 시간이 찾아옵니다.
형님하고 작은 누나가 버스에서 내립니다.
우리는 달려가서 손을 잡는 대신 무엇을 들고 내리는지 이것이 더 궁금했거든요.
앞 서거니 뒤에 서거니 하면서 셍미티 까지 한참을 걸어와야합니다.
수십년 전의 추억을 소환해 보았습니다.
하마루 동네는 지금도 1년에 한번의 다녀온다.
하지만 아무도 반겨주는 이도 없고 찾아갈 집도 없다.
그 시절의 친구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보고 싶다.
공주는 기차역이 없어 아쉽지만 이곳 하마루의 차부가 있어 만남과 이별의 장이 되었던 추억이 서린 내 마음의 찐 고향이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려면 무조건 하마루 차부로 나가야 했다
세상 구경을 하려면 하마루를 지나야했으니 우리 모두의 갈림길이였을것이다.
이글을 적으려고 헌구,연경,기찬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지면을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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