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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전대 (纏帶) [292] 본문
최인태의 세상이야기 T스토리입니다.
방문해 주신 모든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전대[纏帶]란 국어 사전에는~
돈이나 물건을 몸에 지니기 위해서 무명이나 헝겊 따위로 길게 만든 자루 허리에 차거나 어깨에 둘러 사용했다.
전대는 흔이 돈이 들어가는 주머니라고 생각해서 錢帶 라고 알고 있지만 전[纏]은 얽을전,또는 얽힐전입니다.
즉 돈이나 물건을 얽어 매고 다니는 주머니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은 카드가 대세이지만 앞으로는 들고 다니는 전화기인 스마트폰이 그 기능을 할겁니다.
현금도 필요 없는 그런 세상이 되고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전대나 물론 지갑이나 돈 주머니를 따로 만들어 사용했었지요.
오늘은 현대 아닌 수십년전으로 돌아갑니다.
어린 시절에 이웃 아저씨는 소 경매인이셨습니다.
당시에는 우시장의 큰손이셨구요.
이분이 우시장에 끌려나온 덩치 큰 소의 이모 저모를 천천히 살펴보십니다.
첫번째가 외모겠지요.
두번째는 코뚜레를 잡고 입을 벌려 소의 이빨 즉 치아를 확인합니다.
소는 아랫니만 보이게됩니다.
윗니 중에 앞니는 없으며 어금니만 안쪽 깊히 있답니다.
여기 저기 모두 살펴보신후 소의 엉덩이를 내려치면서 큰소리로 외치십니다.
열장이요. 즉 십만원이랍니다.
아마도 1960년대 말이나 1970년대 초입니다.
송아지가 아니고 다자란 즉 도살장으로 실려가거나 다른집의 농삿일을 도우러 가는 큰소입니다.
이분들은 소 중개,경매를 하면서 자신이 직접 소를 구입하여 다른 장에 팔아 차익을 남기는 일도 합니다.
그래서 친구 아버지는 허리에 전대를 차고 계십니다.
당시에는 무조건 현금 거래였으니까요?
그리고 어쩌다 소를 팔려고 나온 아저씨도 전대를 허리에 차야합니다.
왜냐하면 그 많은 현금을 손에 들고 다닐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대라는 돈 주머니는 가죽으로 만든 미끈한 모양이 아니며 무명천이나 조금 질긴 헝겊을 덮대어 주머니를 만들고 길게 꼬리 처럼 만들어 사람의 허리 둘레를 감은후 다시 엮어 매야 하는 길이 일겁니다.
옆에서 구경만 했지 실제로 전대를 만져보지도 못했구요.
장사를 크게 하시는 분들의 전대는 크기도 크고 튼튼했으나 일반인들의 전대는 대부분이 집에서 수작업으로 대충 만든 물건이였을겁니다.
할머니들의 전대는 솔직히 전대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런 모양이였지만 노인분들에게 애착이 가는 주머니였답니다.
허리에 매는 것보다 속옷에 매다는 그런 형식이 대부분이였을거구요.
물론 작은 장사라도 하는 노인들은 제대로 만든 전대를 착용하셨을거구요.
모친께서도 채소 장사를 몇 년 하셨는데 장사 마치고 집에 돌아 오시면 전대를 풀어 돈을 세며 얼마 남았나 하고 계산을하셨답니다.
전대라는 주머니에는 돈만 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 어린 시절에 책보를 손에 들고 가는것 보다 허리에 묶거나 어깨에 걸친후 대각선 방향으로 보자기 끝을 잡아 맨다음 그대로 달려가면 된다.
두손을 자유롭게 사용할수가 있어 자주 애용하였다.
이것 역시 전대라고 하면 전대이다.
욕심 많은 노인들이나 귀중한 물건을 갖고 계신 나이 드신 분들은 그 물건을 직접 몸에 간수해야 안심을 하신다.
대부분이 돈이거나 귀중한 땅문서 아님 작은 금부치 정도는 전대 주머니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 사는 아들에게 큰 돈을 주려면 직접 가지고 가야했다.
소팔고 땅 팔아 모은 돈 임시로 만든 전대에 넣고 단단히 허리에 잡아맨다.
쓰리꾼[소매치기]에게 낭패당하지 않으려면 이런 방법을 선택했다.
최소한 자기 몸속 깊은곳이며 피부와 직접 맞닿은 곳이기도하며 겉옷이 보호하고 있어 안전한곳이리라.
만약에 소매치기가 앞에 아저씨 전대에 돈이 들어 있는 것을 알고 있다면 직접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
성공 확률이 적기 때문이다.
이때는 가깝게 접근해서 술을 먹이거나 물이나 음료수에 약을 섞은 후 마시게 한 뒤 돈을 훔쳐 간다고 한다.
50년전만해도 전대가 필요했다고 본다.
현금을 운반하기 용이하고 안전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평생 한번도 전대를 허리에 감아보지못한 사람들도 부지기수일것이다.
소위 말하는 부잣집의 전유물 비슷한 용도 였기 때문이리라.
본인은 가진게 없어 전대는 생각도 못하고 살았다.
청년기 시절에는 당시에는 장지갑이 유행했다.
남성용 지갑인데 지금 처럼 반으로 접는 방식이 아닌 현금을 그대로 길게 넣는 방식이다.
비닐이나 가죽 제품도 있었지만 나는 쎄무라고 부르는 보드러운 질감의 소재로 만든 가죽 제품이다.
여기서 쎄무란 콩글리쉬 발음이고 chamois 샤모아 발음이 된다.
섀미 가죽으로 표현하는데 chamois leather 이다.
그런데 이곳에 넣을 현금이 없어 대신에 신문지를 돈의 크기에 맞춰 가위로 자른 다음 지갑에 두툼하게 넣고 다녔다.
도둑 맞거나 소매치기 당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 다방에 가면 아가씨들의 환대는 잠시 잠깐 동안에 받았다
두툼한 지갑이 현금이 아닌 신문지 쪼가리 밝혀졌기 때문이였다.
이제는 현금도 전대도 필요 없는 세상이 되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무겁게 들도 다닐 일도 없으며 당장 큰 거래를 한다해도 손가락 몇번이면 누구나 가능하다.
물건이나 현금을 보고 훔쳐가는 일은 별로 없겠지만 편리해진 세상에 맞춰 못된 넘들의 수법도 같은 기술을 따라 발전했다.
이른바 보이스 피싱[voice phishing] 수법으로 더 많은 돈을 빼가거나 훔쳐낸다.
판도라의 상자는 분명 존재했는가 보다.
지키려는 자, 빼내가려는 자가 공존하니 세상 참 아이러니하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몸에 돈을 지니지 않았다고 한다.
무전 취식이 아니고 아랫사람이 대신 갖고 다니면서 사용했다고 한다.
사실 돈이란 깨끗하기도 하지만 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며 서로가 미워한다.
본인도 지난 시절에 돈때문에 받은 고통이 적지 않았다고 말 할수 있다.
이제는 돈걱정은 하지 않지만 돌아보면 서글퍼지기도 한다.
돈이 없어 불효했으며 이제 효도 하러 돌아보니 아무도 안계신다.
핑게라면 핑게일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스마트폰에 알람이 울리면 내 통장의 잔고가 오르고 내릴때 쾌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허리에 차고 다니는 전대는 아닐지라도 손에 들고 다니는 전대임에는 분명하다.
그안에는 돈과 함께 나의 모든것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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