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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경천 장터의 어머니 모습 (18)[212] 본문
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T스토리입니다.
방문해 주신 모든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경천 장터에 관련된 글을 많이 올렸습니다.
1971년도 이전의 모습만 기억나구요.
1960년대 중 후반의 추억이 더 생각이 납니다.
사진이라도 있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시절의 카메라는 꿈도 못꾸던 시절이였으니까요.
다른 방법으로 사진을 얻으려 노력했지만 힘드네요.
몇장의 흑백 사진을 어렵게 구해서[스크랩 또는 퍼옴] 올려드렸습니다.
저작권 문제도 있고 사실 돈주고 구입할수만 있으면 더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기억에서 멀어져만 가는 희미한 그시절의 생활상 아니 부모님 세대의 자화상이 아닐까요?
저보다 5년 선배님 정도 아니면 10년 앞선 형님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 나이가 2023년에 70세이니까 금년 75에서 80세 사이의 기억이라면 더 좋겠습니다.
지금 세상에 75세나 80세는 아직 장년의 나잇대가 아닐까요?
금년 103세의 김형석 교수님 모습만 보아도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정말로 경천장터 구경하신분들이 안계신것인지 이글을 보시고도 모른척하시는것인지 궁금합니다.
80세 정도 까지는 컴퓨터하고 그렇게 멀리 떨어진 나이는 아니라고 봅니다.
관심이 없으신것으로 알고 넘어가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경천국민학교 19회 졸업생이며 무학고등학교 졸업하고 신문대학을 나왔습니다.
1963년경이면 제 나이가 10살이였으니까 어느 정도 희미하지만 기억은 떠오릅니다.
한달에 평균 6번의 장날이 있습니다.
1년이면 70번의 장날 10년이면 700번의 장구경을 했네요.
장마당을 지나서 학교에 가야했으므로 방학이든 아니든 장날은 빠지지 않고 구경한것 같습니다.
여러 장면이 떠오르지만 가슴이 아린 모습은 보릿고개 당시의 장마당에 우리들의 어머니 얼굴 모습입니다.
남자분들은 막걸리 한잔에 흥에 겨우시거나 상대방의 허리 띠 를 움켜 쥐고 골목 싸움하시는 모습만 떠오릅니다.
첫서리 내린 어느날 엄마는 어둠이 짙은 새벽 잠에서 일어 나셨다.
7식구의 아침 밥을 준비하느라 바쁘시게 움직이신다.
오늘은 이십리 먼길을 걸어 다녀 오는 경천 장날이기 때문이다.
산 고개를 넘고 내를 두개나 건너야 하는 험한 길을 다녀 오셔야 한다.
이고 지고 갈 물건도 없는데 장을 보려니 무엇이든 들고 나가 돈을 만들어야 했다.
안개 내린 여명에 동구 밖에서 동네 아주머니 몇 분과 함께 서둘러 길을 앞장서 걸어 가신다.
아침 햇살이 조용히 어깨 너머로 내릴즈음에 멀리 다롱고개가 보인다.
저 고개만 넘어 서면 장마당이 보이고 팽나무 거리에 장꾼들이 마중 나와 기다린다.
장삿꾼에게 바로 주면 몸은 가볍지만 제 값을 쳐주지 않으니 실랑이를 버리다 결국은 머리에 이고 그대로 장마당에 들어선다.
그렇다고 엄청 더 많이 받는것도 아닌데 괜히 손해보는 느낌이라서 선뜻 내주지 못하신다.
물건을 건네 주고 받은 몇 푼에 갑자기 엄마는 걱정이 밀려 든다.
사야할 물건은 많고 돈은 적으니 걱정에 고민에 정신이 없으셨다.
이제 찬바람이 불었으니 곧 눈이 내리고 겨울이 시작될것인데 시어른들의 겨울 내복도 준비해드려야 하고 아이들 옷도 필요했지만 오늘 장날은 아무것도 못할것 같다.
다음 장날에는 추수를 더 해서 그때 장만해야지 하고 생각하지만 어머니의 가슴은 이미 어두워지고 있다.
어머니도 여자인데 동동구르무 장사의 하모니카 소리가 오늘 따라 더욱 크게 들리는 것은 왜 일까?
방물장수의 목판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표정이 미어져 온다.
막내 딸이 꼭 한개만 사달라 하던 머리핀을 만지고 만지다 결국은 내려 놓으신다.
아이들 기성회비도 밀려 있으니 더욱 걱정이시다.
시어른들 저녁상에 생선 1마리라도 올려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장터의 국밥집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는 고역에 가깝다.
어머니 혼자만 고기 국밥을 드실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은 멀건 국수 한 그릇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다시 먼 길을 걸어 가야 한다.
엄마의 장마당 나들이를 목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위해 어머니는 사탕 몇 알을 사서 주머니에 넣으신다.
우리 어머니는 경천 장터에서 채소를 팔으셨다.
계룡산에서 흘러 내려 오는 물은 물레방아를 돌리고 돌징이 마을 지나 경천 장터를 도랑을 타고 흘러 간다.
작은 도랑위에 널빤지를 깔고 그 위에 각종 채소를 쌓아 놓고 팔고 계셨다.
그 도랑가에는 어머니와 같이 채소를 파는 어머니가 몇 분 더 계셨으며 한참 아래로는 직접 만든 두부를 파셨다.
계절별로 채소와 과일을 번갈아 내 놓고 장사를 하셨다.
나는 햑교를 마치고 지나는 길에 어머니의 채소 더미를 바라본다.
좌판위의 물건이 그대로 있으면 어린 나도 가슴이 아팠다.
다 팔려야 기성회비도 내고 검정 고무신도 새로 사야 하는데 걱정이다.
해가 노성산 산마루에 걸리면 나는 지게를 지고 장터로 간다.
어머니 좌판에 남은 채소나 과일을 지게에 지고 집으로 돌아 온다.
물건이 그대로 남아 있어도 어머니도 환하게 웃으시지만 속으로는 걱정이 태산이신것을 나는 알고 있다.
남은 채소는 다음 장날인 월암이나 상월장으로 머리에 이고 먼 길을 다녀오신다.
우리 동네에는 장터에서 물건을 파는 어머니가 몇분이 더 계셨다.
옷을 파시는 분, 광목을 주로 파는 포목점도 계시고, 두부를 만들어 팔고 버드나무로 만든 시골생활의 필수품인 키를 만들어 팔던 어머니도 계셨으며 울엄니 처럼 채소나 과일 파는 어머니도 몇 분 더 계셨다.
모두가 경쟁관계였지만 서로 도우며 장터에서 힘든 하루를 보내셨답니다.
장마당을 둘러 보면 사계절 내내 사람들로 북적였다.
대부분이 어머니들 즉 부녀자들이 많으셨고 남자들은 우시장 같은 가축을 파는 장소나 대장간 그리고 대포 한잔 하는 막걸리 파는 주막집에 많이 계셨다.
내일 경천 장날 돼지 새끼를 팔러가는 봉길이 아버지가 부럽기도하고 무슨 핑게를 대던 장구경을 가야하는 동철 아부지는 고민에 빠졌다.
돼지 새끼 12마리가 태어나서 이장님네 리어카를 빌려 싣고 그 뒤에는 동네 아저씨들이 애먼 장닭 한마리 또는 토끼 한마리를 들고 뒤를 따른다.
봉길네 돼지 12마리 팔면 돈이 얼만데 배도 아프고 부럽기도 하고 핑게 김에 장구경도 하고 술한잔 마실려면 돈이 필요했으니...
아버지들은 모든게 그냥 태평하신 듯했다.
장마당에 무엇을 팔아도 그돈으로 식구들 먹을거리를 사는일보다 술 한잔이 항상 앞섰다.
해질녘에 다롱고개 넘어가는 울 아버지들의 손에는 명태 한마리가 달려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였다.
장마다에서 물건을 팔고 계시는 어머니들 또한 그 물건을 사려는 어머니들 그 시절에 우리 어머니들 어렵고 힘든 삶을 살으셨지만 모두가 불행하다고 말 할수는 없을 겁니다.
모두가 경쟁관계였지만 언제나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으며 넘치는 정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머니가 논산장에서 내일 경천장에 팔 물건을 구매하러 떠나셨다.
학교 다녀오면 지게지고 마중을 나오너라 그래서 부지런히 마중을 나갔습니다.
아마도 상월면 지경리 초입에서 울 엄니를 만났습니다.
울엄니 머리위의 광주리는 내 지게로 옮겨졌지만 울 엄니는 옆에 나이가 더 많으신 어머니의 짐을 대신 이고 가시는데 기분이 참 묘하더라구요.
어린 마음에 효도한다고 나선길인데 울엄니 어차피 힘드시네요.
그래도 기분좋은 하루였답니다.
모든것이 부족했고 연로하신 부모님이나 자식들에게 넉넉하게 해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셨지만 나름 최선을 다 하셨을 우리들의 어머니 모습 이젠 볼수 없지만 우리의 기억에는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1967년 초여름으로 기억나네요.
오늘도 장돌뱅이 마냥 장구경을 하는데 기름집 앞에 사람들이 아니 어머니들이 많이 모여계시네요.
뭔일이다냐 틈을 비집고 들어가보았습니다.
월남전에 금방 귀국한 참전용사 한분이 군복 차림으로 서있고 어머니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군인 아저씨의 손목도 잡아보고 얼굴도 만져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네요.
둘러보니 남자 아저씨들은 안계시고요.
자식들 군대 보낸 어머니들만 모여계시네요.
연세가 많아 보이는 어머니들은 눈물도 흘리시구요.
우리집도 큰형님은 제대한지 1년됐구요, 막내 숙부님은 전방에서 근무중이였습니다.
그외에 경천장터 주변의 수십개 마을에서 월남전에 참전하신분들이 많이 계실때였습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자신의 자식이 사지[死地]에서 살아 돌아온 기쁨을 대리 만족으로 기뻐들하시네요.
돌아서서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시는 어머니도 계셨구요.
내 자식 내 아들도 아니지만 우리 어머니들의 마음은 모두가 같은 마음이였을겁니다.
그때의 어머니들 얼굴 표정이 생생합니다.
장터가 워낙 넓고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장구경도 쉽지 않았다.
더구나 본인은 10살갓 넘은 정도의 어린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본문의 내용도 나이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보았던 그 느낌 그대로입니다.
경천에서 성인되고 결혼하고 자식낳고 살았다면 이야기는 더 진지하고 풍성해졌을지도 모릅니다.
장터의 어머니들 모습은 모두가 한결같으시며 당신들을 위한 장터 나들이는 아니였으까요.
시장에는 여러가지 옷들을 걸어놓거나 바닥에 진열해놓고 판매합니다.
아이부터 어른들 옷까지 남녀 구부없이 구비되어있었지요.
어머니는 당신 옷은 생각도 못하고 아이들 옷 그리고 어른들 옷부터 생각하셨을겁니다.
포목점은 온갖 색깔의 원단을 걸어 진열해놓았는데 지나가면서 눈으로만 곱다 곱다하시면서 발길을 돌리십니다.
신발을 파는 곳에는 색색의 온갖 신발이 구비되어있었지요.
물론 검정 고무신이 제일 많았지만 말입니다.
어른들에게는 새하얀 고무신을 딸아이들에게는 꽃신을 사주고 싶지만 주머니 사정은 엄두를 못내 돌아섰지요.
아이들과 함께 장터에 나온 엄마는 더 힘들었것 같네요.
특히 젖먹이를 등에 업고 나온 엄마는 수유부터 지저귀가는일까지 먼길 오가며 고단하시자만 그래도 장터에서 몇가지 구입한 물건을 들고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십니다.
장터 한쪽에는 주방용품이랄까요? 주전자부터 밥그릇에 국그릇 온갖 사발에 그시절에는 양은 제품으로 노란색이 인기가 많았을겁니다.
여기 저기 한참을 둘러보던 어머니는 한숨이 앞섭니다.
경천 장마당에서 가장 활기 넘치고 웃음 소리가 들리는 곳은 싸전입니다.
싸전은 쌀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즉 사고 파는 장소인데 여기서는 말강구 또는 됫강구의 역할이 대단합니다.
앞서 말씀 드렸지만 예전에는 계량하는 도구가 거의 없었으므로 내가 오늘 갖고 나온 쌀이나 곡물의 양이 정확하게 얼마인지 몰라서 거래가 어렵기 때문에 말이나 됫박으로 전문으로 계량해주고 수수료라고 할수 있는 남은 양의 쌀이나 곡물을 받는 사람입니다.
말강구,됫강구라고 부릅니다.[전문인]
이분들은 한말짜리[규격화된 제품]와 한되짜리 됫박을 손에 들고 기다립니다.
당시에는 쌀은 현금[돈]이나 마찬가지이며 집에서 많든 적든 여기에 와서 내다 팔면 그 돈으로 오늘 장을 보거나 집에 가져가서 생활비로 사용할겁니다.
장마다에 와도 싸전을 들르지 못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내다 팔 쌀도 없거니와 돈 주고 쌀을 구입할 만큼의 여유가 있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 어머니의 소원은 저기 싸전에 장말마다 들어 가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들른곳은 어물전입니다.
당시에는 냉장고나 냉동 시설이 없었으므로 정말로 모든 생선이 신선하였지요.
장기간 보존하는 먹거리는 새우 젖이나 조개 젖 처럼 모두가 염장 식품이였지요.
지금 처럼 생선을 손질해주지는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비닐 봉지도 없어서 생선 아가미에 짚을 넣어서 일명 손잡이를 만들어 주었지요.
그래서 생선은 모두 손으로 직접 들고 가셨을겁니다.
돼지 고기 쇠고기는 명절에나 찾았지만 장날에는 생선 한두 마리는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가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어물전 옆에는 건어물을 파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답니다.
마른 멸치나 마른 새우 그리고 미역과 김 그외에 큰 잔치에 꼭 사용하는 건조된 큰 문어나 오징어가 있었습니다.
건조된 문어는 잘라서 먹는 용도가 아니라 가위로 봉황을 만들어 내는 일종의 예술작품이였습니다.
지금은 드라마에서도 잘 안보이더라구요.
장터의 약장수 마이크 소리가 더 크게 들리면 파장에 가까운 시간입니다.
이들은 사람들을 최대한 많이 모일수 있도록 시간 끌기를 합니다.
자루속에 머리가 둘 달린 뱀이 있다지만 아직까지도 보여 주지 않았구요.
원숭이의 줄타기가 한창이고 등에 큰 북을 지고 입으로는 하모니카를 부는 아저씨의 흥이 오르면 이제 본격적으로 약을 선전하며 강매하듯 팔기 시작합니다.
어린 나이에 무엇인지도 모르고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라해도 우리는 꼼짝 앉고 앉아서 구경했습니다,
대부분이 회충약이나 위장약 그리고 무엇인지 모를 정력제,영양제 비슷한 물건이였지요.
약장수의 음악이 꺼지면 이제 파장입니다.
장꾼들 대부분이 잠을 꾸리기 시작합니다.
이때 셍미티 나가는 갱변에서 쉬고 있던 도락꾸에 조수 아저씨가 트럭 범퍼 위에 올라가서 크랭크를 끼운후 강제로 돌리기 시작합니다.
아저씨 이마에서 땀방울이 맺힐때면 도락꾸는 시커먼 연기를 하늘로 내뿜으며 시동이 걸립니다.
그리고 장마당으로 이동해서 장삿꾼들의 남은 짐을 저녁 늦도록 도락꾸 짐칸에 높게 높게 쌓았습니다.
이제 나도 엄니와 함께 남은 채소를 지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셍미티는 성밑 마을, 갱변은 시냇가 모래 자갈밭, 도락꾸는 트럭입니다]
전후 부터 60년대 70년대를 살아 오신 우리의 어머니들께 사랑과 존경과 감사의 예를 올립니다.
당신 들은 시집오는 날부터 층층시하의 어른들 모시고 가난한 살림에 농삿일에 자식들 양육하랴 허리 한번 못 펴시고 정말로 수퍼우먼입니다.
저희 모친의 경우에도 소위 위안부에 끌려갈까봐 외조부께서 어린 나이에 뒷집의 총각에게 시집을 보냈답니다.
당시의 어머니 들은 큰 며느리 작은 며느리 안가리고 일년 두번의 명절과 달달이 찾아 오는 제사를 모두 준비하셨지요..
부모님 돌아가시면 모두가 3년상을 치루셨으며 제삿날이면 전날부터 큰집에 모여 놋그릇닦는 일부터 시작하십니다.
옛날 기왓장을 망치로 잘게 부순 다음 가루로 만들어 지푸라기에 묻힌후 놋그릇을 빙빙 돌리며 하루 종일 땀을 흘리셨지요.
아무리 힘드셔도 불평 불만 없이 모든 일은 해내셨습니다.
이제 뒤돌아보니 모두 안계시네요.
그래도 그 시절의 어머니 얼굴 아니 경천 장마당의 어머니 얼굴이 생각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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