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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문경 새재 이야기 [210] 본문
최인태의 세상이야기 T 스토리입니다.
방문해 주신 모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문경 새재는 영남 지방에서 한양으로 올라 가는 여러 갈래의 길목중에 하나입니다.
위로는 죽령[竹嶺]이 있으며 아래로는 추풍령[秋風嶺]이 있다.
사실 문경새재의 역사는 그렇게 오래 되지 않았다.
이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이동의 필요성으로 평지에는 자연스레 길이 만들지고 험준한 산에는 고갯길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삼국시대 훨씬 이전부터 국가의 형태가 생겨나고 통치의 수단으로 전국에 통행로가 필요했던 것이다.
두발로 걸어가야만 했으니 최단 거리가 생겨나고 너무 높은 고갯길을 피해서 가급적이면 낮은 산등성이를 이용했을것이다.
군대의 장수들이나 말을 타고 달렸을것이며 국가의 명을 전달하는 파발마[擺撥馬] 정도의 마필[馬匹]이 있었을것이다.
그외의 일반 백성들은 개나리 봇짐을 지고 보부상들은 등짐을 이고 지고 걸어서 이동했을것이다.
문경새재의 역사는 조선 태종[1414년] 14년에 만들어진 영남 대로중에 하나이다.
현대의 용어를 빌리자면 문경새재의 개통은 일반 도로에서 고속도로 급으로 관도 벼슬길의 역할이 컸다고 할수 있다.
교귀정의 역할과 과거 길을 떠나는 선비들이 주로 이용한 것을 보면 알수 있을것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허무하게 뚫려 버린 방어선 때문에 선조는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조령의 험준한 지형을 그대로 두고 평야 지대인 탄금대에서 일전을 노렸지만 순식간에 대패하고 목숨까지 잃었다.
그후에 성벽을 쌓고 성문을 달았으나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후대에는 인기 관광지가 되었다.
문경 새재란 이름의 유래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조령[鳥嶺]은 글자 그대로 새의 고개인데 새들이 날기에 힘들어 보이진 않지만 믿어본다.
조령 주변에 새라고 부르는억새풀이 많아서 새재라 불리웠다고 전해진다.
하늘재[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의 사이에 만들어져서 새재로 연유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바로 옆의 하늘재를 버리고 새로 만들어져서 새재라 했다고 전해진다.
동네 이름이 문경[聞慶]이라는 이름과 이곳의 옛지명이 문희[聞喜]에서 보이듯 경사스런 소식이나 기쁜 소식을 들을수 있어 벼슬길에 나설때는 멀더라도 일부러 돌아서 문경새재를 이용했다고 한다.
전후 조정에서는 새재를 막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 하여 전쟁 대비로 성을 축조하게 이른다.
선조 30년에 [1597년]에 신충원이 파수관으로 임명되자 일자형의 성벽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워 새재의 산성이 완공되었다.
2관문인 조곡관은 선조 27년[1594년]에 신충원이 축성하였으며 중성[中城]이라고도 한다.
1관문인 주흘관은 숙종 34년 [1708년] 에 축조되었다.
그후에 이화령으로 새로운 길 신작로가 만들어져 이 길은 사실상 폐도가 되었다
3개의 관문과 경상감사의 관인을 주고 받던 교귀정 그리고 원터라 부르는 나그네의 숙소 터가 남아 있으며 주변의 경관이 빼어나다.
주흘산 등산을 위해 이곳을 찾았고 2관문까지 산책으로 몇번 다녀 왔다.
1990년에는 여름 피서로 가족 나들이를 다녀왔다.
당시에는 새재 입구에 식당과 숙박 시설 몇군데 였으며 주차장도 넓지 않았다.
1981년 도립 공원으로 지정되었으나 관리가 미흡한 부문도 적지 않았다.
물론 찾아오는 탐방객이 많지 않은 원인도 있겠지만 촬영장 셋트가 완공되고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찾아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우리나라의 아리랑 민요가 지명으로 몇군데 등장하지만 문경 아리랑은 왠지 생소하게 다가온다.
진도 아리랑과 밀양 아리랑은 흥겹게 들리고 정선 아리랑은 한스러운 느낌이며 문경 아리랑은 그냥 창에 가깝게 들린다.
진도 아리랑 가사에 나오는 문경새재란 단어가 도마위에 오른적이 있다.
사실 전라남도의 바다 건너 섬지방 진도와 경상북도 문경의 거리가 수백 km 인데 그 옛날 노래가 만들어질때 의구심이 드는것은 왜일까.
여러가지 설[說]이 존재하는데...
대한민국 국악계에서 악보와 노랫말을 제작하기 위해 진도 방문시 문전세재란 토속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넘는 것으로 보고 그냥 높은 고개려니 생각하고 그와 발음이 비슷한 문경새재로 변화된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진도 아리랑의 원래 가사는 문전세재가 어법에 맞는데 왜 뜬금없이 문경이 나오는지 모를일입니다.
문전세재란 사람은[어머니 즉 여자] 태어나서 3번의 고개를 넘는데 첫번째 고개는 안방에서 부엌으로 나가는 쪽문을, 두번째는 부엌에서 마당으로 나가는 쪽문을, 세번째문은 마당에서 대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제라도 바로 고쳐서 문경새재를 찾았을때 진도 아리랑 생각이 안났으면합니다.
우리나라 전역에 옛 길이 존재합니다.
구간별로 짧은 거리 겠지만 찾아 내고 개발 한다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을 이을것으로 생각합니다.
문경새재는 옛길의 으뜸이라 할수 있을 정도로 훌륭하게 정비 되어 있습니다.
국토의 중앙에 위치해서 어느 지역에서든 찾아오기 쉬우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학생들의 학습에도 많은 도움이 될것입니다.
아쉬운점은 이지역이 단순하게 관광으로 스쳐 지나가는 길목으로 알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몇년전 부터 새재길에 전동차를 운영하는것을 보고 돈벌이로 생각하는 지자체의 역할이 걱정이 됩니다.
이대로 가면 오래지 않아서 트램을 설치하자든지 케이블카나 출렁다리가 등장할지 모릅니다.
역사적인 장소는 그 의미를 살려 교육의 장이나 후손에게 그대로 물려주어야하거늘 참나....
3관문으로 백두대간에 위치한 조령관은 성벽 중간에 설치한 대문으로만 생각될수도 있습니다.
이곳의 지붕에 떨어진 빗물의 갈림길이 정반대로 흘러 남쪽에 떨어지면 낙동강으로 흘러서 을숙도에서 남해 바다와 만나게 됩니다.
반면에 북쪽으로 떨어진 빗물은 남한강으로 흘러 두물머리에서 북한강과 합류하여 한강대교를 지나 강화 앞바다에서 서해와 만납니다.
빗물만 갈림길이 되는것은 아닙니다.
남쪽의 문앞에서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하면 경북 소방본부나 경북 경찰청 또는 문경 경찰서 관할이 됩니다.
반대 방향에서 발생하면 역시 충북 소방본부나 충북 경찰청 또는 괴산 경찰서에 출동하게 됩니다.
문짝 하나 차이지만 충북과 경북의 관할로 갈라지기 때문입니다.
문경 새재는 영남 지방에서 한양 기호지방으로 올라 가는 관문이며 길목입니다.
기쁜 소식이 들려온다는 옛지명이 문희[聞喜] 또는 경사스런 소식을 기다린다는 지금의 지명 문경[聞慶]이지만 이 고갯길에는 우리 민족의 아픔이 서린 장소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곳을 방어 했어도 전세가 크게 바뀌지는 못했을것이지만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은 3갈래의 공격 루트로 올라 오고 있었답니다.
아래로는 추풍령을 경유하고 위로는 죽령을 넘어 한양으로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왔다지요.
신립 장군이 새재를 버리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격렬한 전투를 치뤘지만 아쉽게도 대패하고 전사하는 일이 벌어졌지요.
결국 선조는 한양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 길에 올랐구요.
우리는 신립장군의 실패한 전술을 탓하지만 장군의 고뇌와 고충도 생각하여야할겁니다.
지금은 2관문으로 부르는 조곡관이 가장 먼저 세워졌구요.
축조 당시에는 중성[中城]으로 후에 조동문,주서문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조곡관으로 부릅니다.
그후 114년의 시간 차이로 1관문인 주흘관 그리고 조령관이라부르는 3관문이 거의 같은 시기에 축조 되었답니다.
1관문,2관문은 남쪽에서의 공격에 대비하였지만 3관문은 북쪽의 공격에 대비하여 축조 되었다합니다.
그러니까 1관을 닫고 3관문도 닫게 되면 3개의 관문은 안전지대가 되기도 합니다.
새재 보존을 위해 몇가지 바라는 마음을 적어봅니다.
지금보다 더 이상의 어떠한 개발행위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너무 상업성으로 흘러 가는 느낌입니다.
입장요금이 없어서 다행이긴하나 맨발로 걷는 길이라 홍보도 하고 신발 보관함까지 설치된곳에 뭔 전동차를 운행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의 유명 관광지에는 인근 주민들의 생계를 위해 억지로 만들어 돈벌이를 하지만 우리는 그들과는 다르지 않나요?
촬영장 입장요금이 불가피한 것은 관리 차원으로 이해합니다.
새소리 바람소리에 취하는데 뭔 음악소리인지 매점도 불가피하다면 조용히 운영하면 될일이 아닌지요?
궁예의 마지막 장면 그림은 허구인데 사실 처럼 오해 않도록 설명을 자세하게 해줬으면 하는 바램이구요.
조곡 폭포 역시 인공으로 만들어진것인데...
쓰레기 없고 화장실도 많이 설치되고 금연장소라서 매우 만족합니다.
몇년 후에 어떤 시설물이 더 만들어질것인지[돈벌이용] 모르겠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몇자 적어 보았습니다.
조화옹의 손길이 스친듯 여기 새재에 조탁의 흔적을 남겼구나.
전란의 상처가 뼈에 사무친 여기 서애의 한이 절벽마다 맺히였네.
청운에 꿈을 가슴에 품은 선비의 발길은 여기 새재에 머물고 있다.
장돌뱅이 허생원과 동이는 여기 새재우 바위굴에 깃들어 있다.
무심한 길손들은 여기 새재의 질곡을 알고나 가는것인지 묻고 싶다.
서애[西厓] 유성룡의 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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