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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 장터의 검정 고무신(16) [203] 본문

오늘의 이야기.

경천 장터의 검정 고무신(16) [203]

현덕1 2023. 4. 15. 20:52

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T 스토리입니다.

방문해 주신 모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요즘 유행하는 대중가요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검정고무신입니다.

노랫가사의 내용이 저에게는 중반 이후에 맞네요.

우리 집은 장터에서 가까워서 혼자 직접 장에 가 거나 어머님이 고무신을 사 오셔도 크기에 걱정이 없었습니다.

여덟 남매가 줄줄이 있었으니 안 맞으면 내려 신으면 되었으니까요.

당시에 공주 경천리의 장터는 충남에서 5대 장터의 규모였으며 공주 지역의 최대 장터였습니다.

장 마당에서 사람을 찾으려면 한참을 헤매거나 만나지 못할 정도였으니까요?

이미 몇번의 경천 장터 이야기를 올렸습니다.

 

이제는 보고싶어도 만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네요.

아무도 안계시네요.

고무신 장수도 어머니도 장터 사람들도 모두 어디로 가셨네요.

나이 들어 뒤돌아보니 희미한 기억의 저편에서 검정 고무신이 보입니다.

우리는 까만 고무신 아니면 깜장 고무신으로 부르다가 어느 날에 타이어표 고무신이 나오고 충청도 표현으로  꺼먹고무신으로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어쩌다 검정 고무신 새것 사주면 처음에는 아까워서 손에 들고 걸어 다녔던 기억이 나네요..

시냇물이 흐르는 물웅덩이에 보면 송사리가 떼를 지어 헤엄치네요.

이때 고무신을 물속에 넣고 기다리면 한두 마리가 들어오면  들어 올리면서 고기를 잡았었지요.

잡은 물고기를 보관하기도 좋았으며 앞에 코를 누른 후 장난감 자동차 놀이도 하였습니다.

 

대추 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 리를 걸어 열하룻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쁜이는 대추를 안 준다고 울었다.

 

송편 같은 반달이 싸리문 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 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 넘어 가까워지면.

이쁜이 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노천명 님의 장날이라는 시[詩]입니다.

 

위의 시처럼 울 엄마는 대추 밤이 아닌 감을 돈사야 검정 고무신 한 켤레 힘겹게 사주신다.

우리 집의 과수나무는 유일하게 감나무이다.

몇 아름 되는 둥치의 감나무가 몇 그루 있었다.

정월 대보름이 지난 며칠 후 땅이 풀리면 감나무 주위로 작은 도랑을 판 후 거기에는 겨우내 받아놓은 당시 최고의 거름인 인분을 골고루 채워준다.

이것을 먹고 자란 감의 열매는 땡감이지만 [월하 감] 쇠젓가락으로 구멍을 내어 소금물에 하룻밤 침을 담근 후 장에 내다 팔았다.

추석빔으로 받은 고무신은 이듬해 거친 땅바닥에 금세 구멍이 뚫린다.

비가 오면 빗물도 들어오고 흙이나 모래가 들어오면 수시로 벗고 털어내야 한다.

아버지 신발 구멍났어유하면 엿집에 가서 바꿔 신으란다.

이 말은 우리 동네에는 고물상이 있었습니다.

직접 만든 엿으로 지게에 지고 인근 지역을 돌며 엿과 고물을 맞 바꿔오는 엿장수 아저씨들이 모아 온 각종 고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습니다.

고물상 한편에는 각종 고무신, 장화 등이 있는데 이곳에서 같은 크기의 신발로 교환하는 것입니다.

마음씨 좋은 주인아저씨는 동네사람 누구든 1대 1로 교환하는 것은 가능지만 하나 놓고 두 개 가져가는 것은 안된다고 하셨다.

그곳에도 짝이 맞는 것이 없으면 장날 고무신 때우는 아저씨가 계신데 이곳에서 얼마간의 돈을 내고 구멍을 막은 후 신게 된다.

당시의 접착제는 열을 가하는 방식이라 아저씨 앞에는 항상 작은 불씨가 살아있어 여름철에는 땀을 뻘뻘 흘리신다.

당시에는 각종 고무신, 장화 등 구멍이 뚫려도 버리지 못하고 때우거나 집에서 실을 이용해 기워서 신어야 했다.

장날 아침이면 서로 먼저 하려고 길게 줄지어 늘어놓은 모습이 기억에 선하다.

 

사실 우리는 경천장날 어머니 따라 고무신을 사러 가지 않았다.

멍멍개가 해 쫓을 일도 민들레 머리 풀이라도 없었다 왜냐면 경천 장터 주막거리에 고무신과 담배를 파는 상점인 우[禹]씨 아저씨네 가게가 365일 장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장날이면 시장 안의 점포에 물건을 다시 진열하고 팔았다.

경천 마을 외에 동네분들은 고무신을 사려면 본인이 직접 와서 발에 맞춰야 했었으니...

1965년도 어느 초여름날 일찍 장구경을 나섰는데 장마당 한편에 게다[게타], [나무로 만든 일본 신발]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고 있었다.

기계로 나무를 깎아 만들었는데 페인트 칠까지 해서 돋보이고 발을 거는 고리 역시 부드러워서 잘 팔리고 있었다.

우리는 집에서 직접 만들어 신기도 하였는데 버드나무를 베어 말린 후 사람들 발길이 만큼 자른 후 앞부분을 자귀로 약간씩 깎아내고 중간 부분을 톱으로 절반정도 자른 후앞쪽으로 다시 살짝 파낸다.

뒷부분은 그대로이며 뒤꿈치를 들며 걸을 때 아주 편하다.

다른 방법은 송판을 자른 후 앞뒤 두 개의 나무토막을 못을 박아 고정시킨 후 사용하는데 가끔 못이 빠지거나 헐렁거리기도 한다.

게다 신발은 흙에서는 비교적 조용하지만 콘크리트 바닥이나 아스팔트 바닥을 걸으면 동네 사람들 잠을 깨울정도로 소리가 컸다.

 

두루마기 한복을 입으신 남자 어른들은 하얀 고무신을, 그리고 어머니들은 꽃 그림이 그려지거나 그냥 밋밋한 하얀 고무신을 주로 신으셨다.

당연 우리 같은 아이들은 검정 고무신도 [타이어표가 아니어도] 좋아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가을 추석명절에 서울 간 친구 고향에 내려왔는데 하얀색의 운동화[당시에는 농구화라고 불렀다]를 신고 있는데 세상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이듬해 추석 한 달 전에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이번 명절에는 하얀 농구화 한 켤레만 사달라고 말씀드렸는데...

대답은 하셨지만 그냥 여름 내내 신던 꺼먹고무신 그대로 신으란다.

경천 장터의 신발 가게를 둘러보아도 고무신은 많은데 하얀 운동화는 한 켤레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이유가 생겼다.

깜장고무신이 아닌 하얀 농구화를 사기 위하여 말입니다.

 

2019년 가을 충북 보은의 대추 축제 현장에 구경을 갔는데 어느 매점에서 고무신을 팔고 있었다.

검은 고무신인데 그림도 그려져 있어 예뻐 보이길래 한 켤레 구입하였다.

집에 와서 신어보니 60 년 전 어린 시절의 발바닥이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는 닳아질세라 손에 들고 다닐 일은 없는데 왜 그리 아까운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고무신은 차등이 없었다 비싼 것도 싼 것도 없었으며 모양새도 거의 같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신발의 크기일 것이다.

지금은 몇 미리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문이라는 호칭으로 아저씨 10문짜리 있어요 하거나 조금 발이 큰사람은 11문을 찾았다.

머슴이건 주인이건 위아래 따지지 않고 똑같이 신는 신발이 고무신이지만 어른들의 외출용인 하얀색의 백색 고무신이 따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말표, 왕자표, 기차표, 범표, 그리고 타이어표였다.

그중에서 타이어표를 알아주었다.

전후에 태어나서 짚신은 신어보지도 않았으며 만들 줄도 모른다.

하지만 조부님 돌아가셨을 때 상주이신 선친과 작은 숙부들은 짚신을 신고 삼베로 된 상복을 입고 문상객을 맞으셨다.

장터에서 짚신을 늘어놓고 팔고 있었는데 저걸 누가 사가는지 궁금했는데 아마 집에 초상이 나면 꼭 필요했던 것이다.

 

가끔은 경천 장날의 풍경 아니 장마당 꿈을 꾼다.

돌아갈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데 그 시절의 모습이 왜 그리워지는지 모르겠다.

세월만 야속할까 덧없이 늙어버린 나 자신도 미운데 이제는 검정 고무신도 새하얀 농구화도 내 마음 한편에 묻어두고 싶다.

W B C의  W는 와글와글, B는 바글바글, C는 시끌 시끌의 첫머리 콩글리쉬이지만 그 시절 장터의 모습을 요약한 영어 문장일 것이다.

경천 장터 [mar ket]의 W B C 란 심각한 인구 소멸 국가인 우리나라의 머지않은 미래의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 story]가 될 것이다.

고무신은 비가 내려도 그만, 논 밭에서 일하다가 물속에 그대로 들어가도 그만, 상갓집이나 식당에서 잃어버려도 그만 하지만 눈 내린 한겨울에는 꽝, 얼음판에서 썰매를 탈 때도 꽝이고, 토끼 몰이 한다고 눈 속을 뛰어다닐 때도 한마디로 정말 꽝이었다.

게으른 몇몇 아이들은 동상[凍傷]이 걸려 발등에서 피고름이 흘러내리기도 하였다.

운동화는 발등까지 덮지만 고무신은 겨우 흙바닥만 면했으니 양말도 목[무명실] 양말이라 보온성이 전혀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모두 이겨내고 건강하게 성장하였으며 좋은 시절을 만나 행복한 노년 생활을 하고 있으니 정말 다행이다.

어린 시절에  양말 대신 버선도 몇 번 신어보았는데 목양말보다 더 불편하게 느껴졌으며  여름철 무더위에는 할머니께서 삼베로 만든 상의 [조끼 비슷함] 도 입어 보았다.

삼베로 만든 반바지도 있었는데 통풍도 잘되고 시원하지만 속히 훤히 보이고 아이들이 놀려서 거의 안 입었던 걸로 기억한다.

 

장마철에 학교 다녀오던 칠봉이는 냇물 건너다 고무신을 떠내려 보냈다.

한쪽 신발 잃어버린 린 그날 저녁 칠봉이는 아버지의 매 타작에 울어야 했다.

며칠 후 칠봉이 아버지는 상갓집에서 고무신을 바꿔 신고 오셨다.

새 고무신 잃고 헌 고무신을 신고 오신  칠봉 아버지는 아들을 외면했다.

 

학교에 가는 삼순이는 고무신이 닳아질까 봐 책보에 넣고 달려가다 신발을 잃어버렸다.

맨발의 딸이 애처로웠던 어머니 하지만 삼순 아버지는 딸을 울타리 밖으로 내쫓았았다.

세월이 흘러 삼순이 시집가는 날 새색시 예쁜 꽃신에 어머니 아버지 눈물을 훔쳐 내렸다.

부모님 환갑잔치에 울 삼순이는 두 분에게 고급진 구두를 선물로 사 왔다.

 

 

어머님 따라 고무신 사러 가면 멍멍개가 해를 쫓던 날.

길가에 민들레 머리 풀어 흔들면 내 마음도 따라 날았다.

잃어버릴라 닳아질세라 애가 타던 우리 어머니.

꿈에서 깨어보니 아무도 없구나 세월만 휭휭.

검정 고무신 우리 어머니

 

보리쌀 한말이고 장에 가면 사 오려나 검정 고무신.

밤이면 밤마다 머리맡에 두고 보릿고개서 잠이 들었네.

잃어버릴라 닳아질세라 애가 타던 우리 어머니.

꿈에서 깨어보니 아무도 없구나. 가슴만 휭휭.

검정 고무신 우리 어머니 잃어버릴라 닳아질세라.

애가 타던 우리 어머니 꿈에서 깨어보니 아무도 없구나.

세월만 휭휭 검정 고무신 우리 어머니.

 

이번 이야기는 장터의 풍경보다 그 시절 우리 부모님들의 삶 자식 사랑의 애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의식주[衣, 食, 主] 중에 내 자식들에게 고무신 한 켤레 좋은 것 사주지 못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 보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무신도 아니요 그 시절 장마당도 아닌 모두 떠나고 안 계시다는 현실이지요.

추억의 검정 고무신이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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