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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경천 양화 저수지 이야기(17) [205] 본문
최인태의 세상이야기 T스토리입니다.
방문해 주신 모든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경천 양화저수지는 관개용으로 건설 되었습니다.
제방 형식은 흙댐이구요.
유역 면적은 800ha 이며 총 저수량은 203만 입방미터 제방의 높이는 17,2m이며 둑의 길이는 160m입니다.
월류측 수로 형식으로 물 넘이 길이는 40m입니다.
경천 저수지 또는 양화 저수지라 부르는 여기는 필자의 고향입니다.
초기에는 신원사 저수지라는 명칭도 있었다 합니다.
계룡산의 서쪽면에 내린 빗물이 고이는 곳이랍니다.
대부분의 물이 신원사 바로 옆의 계곡물이니까요?
저의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들어 있으며 저수지 풍경만 보아도 가슴이 설레입니다.
초등학교 소풍을 양화리를 지나 신원사 계곡으로 다녔으니까요?
지금은 수몰되어 흔적도 없는 양화리 옛 모습이 기억 저편에 희미해지네요.
양화리 표지석이 삼거리에서 반겨주었는데 이제는 잔잔한 물결속에 잠이 들었는가 봅니다.
가을이면 집집마다 감나무의 맛스런 둥근 감들이 물결을 이루고 방앗간의 발동기 소리 마져 수면위에 울려 퍼지는듯 합니다.
1963년 관개용 저수지로 개발하기 위하여 첫삽을 뜨고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시는 중장비가 거의 없었고 거의 인력으로 하던 시절이였습니다.
불도저와 덤프 트럭 몇대 그리고 믹기샤라고 부르다던 콘크리트 배합기인 믹서기 위로 퍼 올리는 윈치등이 유일한 기계였을겁니다.
그 외의 모든 작업은 수작업으로 했구요.
다이너 마이트를 바위속에 넣기 위해서 구멍을 뚫는데 2인1조로 작업합니다.
한사람은 정[釘] 징이라 부르는 쇠를 철사로 잡아 맨 후 잡아 주면 다른 사람은 큰 망치[오함마]로 내려칩니다.
이 작업은 그야말로 달걀로 바위치는 일이였지요.
아마도 하루 종일 한두개 완성하기도 힘들었을것 같네요.
망치를 하늘 높이 올린후 곧 바로 징의 끝을 때리면 그 반동으로 바윗돌이 조금씩 패어 들어갑니다.
이때 망치를 잡은 사람의 입에서 휘파람 소리가 울립니다.
힘들어서 일부러 내는 해녀들의 숨비 소리와 같은 개념 일것입니다.
그 휘파람 소리가 박자를 맞추어 날때 이마에 땀 방울도 함께 흩날립니다.
두분다 수건인지 광목으로된 천을 머리에 감고 작업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여러곳에서 구멍을 뚫기 때문에 망치 소리는 쉼없이 울리네요.
한켠에는 풀무질하는 아저씨의 모습이 보입니다.
간이 대장간 역할을 하는 곳으로 징의 끝이 닳거나 망가지므로 수시로 불에 넣고 재생을 하는곳이지요.
며칠후 구멍이 완성되면 다이너 마이트를 구멍마다 차례로 넣기 시작합니다.
전부 채워지면 통제선을 치고 모두 대피시킵니다.
멀리서 폭파 장치를 누르거나 담뱃불로 붙이면 굉음과 함께 바윗 덩어리가 하늘 높이 올라 가며 먼지가 휘날립니다.
이때 작은 돌덩이가 멀리 날아가기 때문에 아주 위험합니다.
이런 폭파 작업은 물넘이용 수로를 만들때 사용했습니다.
다이너 마이트를 다른 이름으로 남포라고 부르며 우리는 남포가 터진다고 소리치기도 하였습니다.
이때 통제 신호를 못보거나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큰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하기도 하였을겁니다.
우리는 가끔 저수지 공사 현장으로 구경을 나갔는데 어느날 마침 남포가 터져 사고가 날뻔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까지도 혼자만 아는 영원한 비밀이기도 하구요.
양화 저수지 축조 당시 토사 즉 흙은 가까운 곳에서 퍼 날랐다.
기계 없이 인력으로만 작업했으며 미니 궤도를 설치해서 무동력 궤도차를 이용하여 흙을 운반하였다.
원리는 기차 철길하고 같으며 작은 나무 토막을 깔고 그 위에 철로를 설치한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낙차의 힘을 이용하기 때문에 내려 올때만 흙을 가득 담는다.
작업 여건상 여러대를 운용하기 때문에 흙을 담는 장소는 수평으로 만든후 동시에 흙을 삽으로 퍼 담은후 한대씩 아래로 달려 내려 간다.
안전을 위하여 충분한 공간과 거리를 확보한 후 출발한다.
이때 내려 갈때 가속도를 조절하기 위하여 나무 막대기로 되어 있는 수동 브레이크로 조절 하면서 빠른 속도로 달려 내려 간다.
도착지에서도 안전을 위하여 수평으로 만든 후 짐칸의 문짝을 개방하여 흙을 내려 놓는다.
단선이므로 내려온 순서대로 흙을 하차 하면 맨 마지막 궤도차가 제일 먼저 올라 가게 된다.
이때 안전을 위하여 궤도차를 들어서 뒤집어 놓거나 잠시 선로에서 옮겨 놓기도 한다.
올라 갈때는 2인 1조라서 두사람이 힘들게 밀고 올라가게 된다.
이 작업은 매우 위험해서 경험이 많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아니면 할수가 없다.
그외에는 지게를 이용하여 흙을 져나르면 필요한 곳에 일정 크기의 나무 틀을 조립한후 그 곳에 흙을 채운다.
흙이 다 차게 되면 반장 [당시에는 십장으로 불리웠다]에게 확인을 받은후 다시 해체한 후 옆으로 이동 설치하고 다시 지게로 흙을 날라 채운다.
당시의 하루 임금은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
당시 초등학생이였으며 5학년 가을쯤에 담수가 시작된 것으로 알고있다.
우리집에서는 큰 형님과 막내 숙부님이 이곳에서 일을 하신것으로 기억한다.
미국 정부 보조 밀가루를 받아온것으로 알고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밀가루 포대를 가져오면 첫날은 수제비를 만들었으며 다음날에는 국수집에 가서 국수를 뽑아 왔다.
이때 국수 뽑는 집은 무척 바쁜걸로 알고 있다.
1963년에 시작하여 약 4년간의 공사로 1966년말에 완공된 경천 양화 저수지입니다.
사실 저수지 전체가 양화리인데 경천 저수지는 누가 붙였는지 알길이 없네요.
돌징이를 지나 치국산과 쇠산 사이의 계곡으로 들어 가는 입구에 물레 방앗간이 있었으며 조금 더 올라가면 저수지 둑이 나옵니다.
그리고 양화리와 신원사 절을 가거나 계룡산에 오르기 위해서는 지금의 길 즉 새로 만든 신작로 길을 이용했습니다.
당시에는 비포장으로 산중턱에 만들어져서 자주 다니던 길이 아니라서 이상한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6학년 여름 방학에는 저수지에서 수영도 하고 낚시도 하던 놀이터였습니다.
저수지에 물이 차오르면서 고약한 물 냄새가 진동을 하였답니다.
양화리 동네 전체가 수몰 되면서 그대로 남은 변소의 잔존물 그리고 축사로 사용하던 외양간의 모든 오염물이 집을 허물면서 나무 토막은 수거해갔지만 그외 부산물이 남아서 동시에 부식이 되고 발효 되면서 냄새가 몇 달간 지속되었습니다.
마지막 까지 허물지 않고 버티던 둑 바로 옆의 초가집 그대로 수몰되었는데 얼마후 가뭄에 잠깐 노출된 적이 있었는데 물속에 가라앉아 흔적은 있더라구요.
6학년 여름 어느날 전체 학생 아침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께서 어느 학생의 이름을 부르더니 앞으로 나오라하네요.
착한 아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네요.
이 학생이 양화리 사는데 하굣 길에 저수지 근처를 지나다 지갑을 주워서 주인을 찾아주었답니다.
저수지 담수 첫 해부터 몇년간은 낚시가 잘 되어서 수많은 낚시꾼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아이들은 버스만 지나가도 길에 서서 손을 흔들어주었지요.
저수지가 완공되고 수로를 따라 물이 흘러 갑니다.
경천의 넓은 들녁에 젖줄이 되어 풍년 농토를 적셔 주네요.
이물은 경천 장터와 중학교 앞으로 두 방향으로 흐른 다음 계룡저수지에서 흘러오는 물과 합류 되어 용머리와 등정골 앞의 빈재미 들판을 적시게 됩니다.
계룡 저수지는 갑사 방면과 팔자산에서 흐르는 물을 모아 금대리와 유평리 그리고 경천리와 화헌리의 넓은 들판을 적셔줍니다
계룡저수지 역시 관개용으로 1954년 착공하여 10여년간의 공사끝에 1964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유역 면적은 1574ha 이며 총 저수량은 340만 입방미터 이며 제방 높이는14,3m 제방 길이는 288m입니다.
이곳 역시 측수 월류식으로 흙댐으로 건설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 살던 동네 성밑 마을은 그림의 떡이였습니다.
물이 한 방울도 흘러 오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저수지에서 나오는 물은 우리 동네 반대편으로 흘러갑니다.
즉 저수지의 물이 건너올 도랑이나 다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네 회의 여러 차례 거듭하여 섶다리 닮은 물길을 만들기로 하고 산에서 나무를 잘라서 X 형태로 냇물 전체를 건너올 만큼 세웁니다.
그리고 다시 나무를 길게 깔고 그 위에 함석을 U자 형태로 길게 맞춰 고정을 합니다.
드디어 물이 흘러옵니다.
하지만 문제가 또 발생합니다.
물 길은 모두가 개인 사유지를 통해야합니다.
모든 일정이 늦어지는 바람에 우리는 밭에 콩을 이미 심어 놓은 상태로 부랴 부랴 논으로 급하게 만들었습니다.
모내기도 당연 늦어졌구요.
밭 농사하다 논이 되면 땅이 평평해야 합니다.
중장비가 없던 시절 급한 대로 물이 닿는 대로 모를 내고 그러지 못한 곳은 그대로 밭농사를 하였습니다.
이 섶다리는 장마철에 떠내려 가면 다시 보수하고 모두가 노심 초사하였지요.
당시의 쌀 농사는 그대로 돈이 되었으니 모두가 마음만 급했던 것입니다.
물은 그대로 흘러서 용머리에서 정식 수로에 합수되어 상월면 지경리 들판까지 흘러 갔습니다.
산과 물은 맑은 정신을 지키며 그대로인데.
사람과 나는 혼돈의 삶 속에 오늘도 늙어 간다.
가버림을 추억 하며 울부짖음 은 소용 없음에 탄식으로.
오지 않는 미련에 나는 부질 없는 몸부림 치고 있다.
만남이 없는 미래는 그 얼굴에 햇살이 되고.
기다림에 지쳐버린 육신은 오늘도 고달프다.
팽나무 노란 열매 달고 뜰 앞의 미루나무 하늘이 높은데.
뜸북새 노래에 서울 간 누이가 오늘도 그리워진다.
새벽 댓 바람에 열린 사립문은 부엉이 노래 할때 닺히려나.
쟁기친 논 두렁의 워낭 소리에 오늘도 울 아버지 기다린다.
지리산을 우리는 물 공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해발 높이 1915m 의 천왕봉을 비롯하여 수많은 계곡과 능선을 안고 있다.
삼도봉은 전남북과 경남의 일부가 맞닿아 있으며 남북으로 길게 늘어선 대간의 출발점이된다.
계룡산 역시 크기는 지리산에 비할바가 못되지만 크고 작은 저수지와 소류지및 방죽이 물을 담고 있으며 주변의 농경지와 사람들에게 풍부한 물을 공급해주고 있다.
계룡 저수지와 경천 양화저수지는 계룡산의 물공장에서 흐르는 물이 채워진 곳이라 할수 있다.
저수지가 건설될 당시만해도 금강 하구둑이 없어서 만조시에 강경을 지나 논산 부근까지 바닷물이 밀려 왔다.
지금도 강경은 젓갈 고장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 수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저수지 아래로 흐르던 개울에는 재첩 조개와 갈겨니는 물론 피라미와 잉어 붕어등 어족 자원이 풍부했다.
참게와 장어[뱀장어]도 많이 잡혔으며 1급수의 맑은 물에 다슬기와 우렁이등 서식했다.
참게는 가을철에 경천 장날이면 짚으로 연결하여 참게의 다리를 접어 묶은후 판매 되었다.
지금은 전설의 고향이야기 일뿐이다.
농지 정리와 하천의 준설및 장마 대비 정비 핑게로 난개발을 해놓고 하구둑을 막아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지 못해 죽은 강 아니 죽은 물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토종 물고기는 사라지고 외래종 블루길과 배스는 살아 남은것 같다.
저수지 건설후 34년이 지난 1990년에 완공되어 물길이 완전히 막혀 버렸다.
논산 참게 아니 노성 참게는 아직도 그 명맥을 유지 할수 있는것은 인공으로 번식 한후 노성천에 방생하여 키운것이다.
저수지가 완공 되고 수많은 변화가 있었다.
천안 행정리 1번국도의 삼거리에서 차령고개를 넘고 금강대교를 건너 다시 늘띠 고개를 지나고 계룡면소를 지나 하마루에서 좌회전하여 경천을 지나 이곳 저수지 까지 비포장 도로인데 낚시꾼을 태운 버스가 저수지 근처에 왔으니 구경 거리가 되었다.
서울 사람들을 구경하는것이 몇 년전에 우리 동네에 사냥하러 우리집에 왔던 사람들 이후 처음이다.
우리는 대나무를 잘라 만든 길이가 고정된 낚싯대 였는데 서울 사람들 낚싯대는 아주 짧았는데 잡아 당길수록 길게 늘어지는게 아닌가!
아하 저렇게 만들었으니 버스에 싣고 오는 거지 우리 같은 낚싯대는 버스에 못 실어 너무 길어서 그리고 우리의 낚싯대는 원래 찌가 없는데 서울 사람들은 여러가지 색칠을 해서 아주 멋진 물건이였다.
서울 사람들이 떠난 자리를 부지런히 찾아 다니면 그들이 버리거나 흘리고 간 낚시줄 토막이나 부러지거나 망가진 찌도 몇개 주울수 있었다.
경천 장터에서 낚시 줄과 바늘은 팔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살려 해도 돈이 없다.
그러니 저수지가 보물 창고가 된것이다.
방울 소리가 들리는 방울 낚시, 밤에도 낚시가 가능한 간드레등 을 이용 하는것을 보았다.
원래 어두운 곳에서 사용하는 불빛으로 탄광에서는 필수품이였다.
카바이드를 연료로 사용하여 불빛을 얻는 장치로 바람이 불어도 쉽게 꺼지지 않는다.
경천 저수지는 수영장이며 보물 창고이며 우리들의 놀이터 였다.
1971년 봄 경천을 떠날때 까지 수시로 찾아 갔다.
담수가 시작되고 불상사도 발생 했다.
익사 사고도 일어났지만 극단적 선택의 사례도 종종 발생했다.
1960년대 말까지 계룡산 일대는 기도를 올리거나 도를 닦는 도사들 숨어 사는 은인[隱人] 들이 많았다.
1968년 지리산에 이어 국립 공원 2호[산]로 지정된후 대대적 정비 사업으로 모두 철거되거나 쫓겨 났다.
당시의 교통편이 너무 열악해서 서울이나 대전 그외의 지역에서 계룡산에 들어 오려면 하마루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후 걸어서 신원사 입구까지 힘들게 걸어 가야 했다.
이때 무거운 짐이라도[기도 용품] 있으면 대기하고 있던 짐꾼 [지겟꾼] 에게 부탁해서 서울 사람은 앞에서 걷고 짐꾼은 뒤에서 따라갔다.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 까지는 수몰 되기 전의 양화리 마을 안길을 걸어 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겨울철 저녁 나절에는 계룡산의 먼산 나뭇꾼들이 나무를 잔뜩 지게에 지고 줄을 맞춰 걸어 내려오던 모습도 이제 기억에 의존해 본다.
짐꾼 아저씨 나뭇꾼 아저씨, 형님들 모두 어디로 가셨나요?
지금도 저수지 둑 가운데 서면 그 옛날의 풍경이 아스라이 그려진다.
연천봉과 천왕봉은 이미 수천만년 전부터 그 자리에서 나를 기다려 주었는데 말입니다.
지구 탄생에서 오늘 까지의 시간을 계산해 보면 인간의 백세 인생은 허망한 일이지요.
양화리 수몰후 60년의 시간이 지났지만 우리들 마음속에는 어제일 같이 아니 불과 며칠전의 이별같네요.
경천 양화 저수지 이야기를 저의 기억속에서 꺼내 보았습니다.
건설 당시 현장에 계셨던 분이 이글을 보신다면 영광이구요.
현재 나이 70대 중반이 넘으신 분들의 기억도 생생하리라 봅니다.
틀린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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