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회초리와 매질 [178] 본문

오늘의 이야기.

회초리와 매질 [178]

현덕1 2022. 10. 7. 20:04

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T스토리입니다.

방문해 주신 모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한국어 사전에 ...

회초리란?

벌로 아이를 때릴 때나 마소를 부릴 때 쓰는 가늘고 긴 나뭇가지라고 쓰여 있다.

 

어린 시절에 회초리 안 맞아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회초리는 사랑의 매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이나 학생들에게 적용하는 단어지요.

어른들이 맞는 매는 태형이라든가 또는 매질당했느니 놀부전에서 흥부는 매품을 팔아 자식들을 먹여 살렸다고...

회초리로 맞는 일은 말을 안듣거나 잘못했을 경우일 겁니다.

하지만 어른들이 맞는 매질은 죄를 지었을 경우 태형이라는 형벌을 받았다고 한다.

거의 반죽음 이거나 초주검에 가깝게 죽지 않을 만큼만 맞는 것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남자들이라면 군생활의 경험이 있을 것이다.

1980년대 부터 민주 군대라 해서 구타행위가 금지되고 매질 또한 금지되었다.

졸병 때 맞은 만큼 고참이 되면 되돌려 주는 반복적인 행동으로 때리고 맞았다.

본인 역시 1년의 단기 사병이지만 율포리 1*9 연대에서 근무했다.

부대 외곽에 콘세트 막사가 한동이 있었는데...

칸을 3곳으로 나누어 첫 칸은 예민실로 예민 과장[대위] 방위병 1명이 근무하지만 과장님은 거의 외근이었다.

가운데 칸은 출입문을 열면 예민실을 지나서 단기 사병 내무반이 있었다.

12명이 1조, 3개 조가 3일 간격으로 근무하는데  야간에는 점호 전이나 후에 현역 선임들이 찾아와 사람을 괴롭혔다.

마지막 칸은 PX로 매점이었다.

단기사병 내무반을 반으로 나누어 의무실이 있었으며 의무병인지 위생병인지 뭐 이상한 놈이 한놈 버티고 있었다.

당시 계급이 상병으로 전남 어느 섬이 고향이란다.

이름은 최 *남으로 기억한다.

 

160도 안 되는 아주 작은 키였으며 의대 재학 중에 입대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대 유일의 주특기병으로 아무도 건들지 못했다.

이 새끼가 어느날에 하필이면 내가 근무하는 날 밤에 어디가서 까이고 와서 화풀이로 아무 죄도 없는 우리를 잡았다.

근무서는 3명 제외하고 기절 직전까지 몽둥이로 허벅지를 맞았다.

같은 현역병도 아니고 우리하고는 아무것도 아닌데 이새끼가 눈깔이 뒤집어져 가지고 난쟁이 비슷한 체구로 겁나게 맞았다.

다음날 퇴근하고 버스에서 내려 육교를 올라가야 하는데 이런 된장 할 죽일 놈의 개새끼 때문에 눈물이 난다.

집에 도착해서 부모님 모르게 행동을 하려니 더욱 힘들었다.

하루 종일 누워서 끙끙 앓았다.

결국 다음날 식구들 모두 알게 되고 당시 푸세식 화장실에서 다리를 구부리지 못하고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현역병 같으면 다리가 부러져도 부대 안에서의 일이기 때문에 부모님들이 알지 못한다.

더구나 본인은 할머니도 계셔서 더욱 힘들었다.

이개새끼를 지금 만나면 아주 죽여 버리고 싶다.

거의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잊을 수 없다 아니 절대 못 잊는다.

 

대구 출신의 물 하사 김*엽 이 새끼 또한 미친놈 시키였다.

이놈은 신장이 180이 넘어서 올려보아야 했다.

이 개새끼가 상병들한테 린치 당하고 우리 내무 반와서 지랄 지랄하다가 나를 타깃으로 불러 세우더니 한방 명치 아래로 맞았다.

윽 소리 냈다고 다시 한방 더 뭐 이런 새끼가 그래도 이놈은 몽둥이는 들지 않았다.

이 두 새끼들 잘 처먹고 잘 사는지 모르겠다.

당시에 내가 24살이었으니까 이놈들 나보다는 3~4살 아래였을 것이다.

회초리도 매도 아닌 몽둥이에 주먹으로 난타당했으니 같은 현역이거나 단기사병이었으면 여기에 이런 글 올리지 않았을 것이다.

매도 맞는 이유나 맞을 놈한테 맞아야 값어치가 있는데 말입니다.

 

모세 율법에도 매질이 있었다.

지금은 금기로 되어있다지만 어디든 항상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이지요.

조선시대에는 매질 즉 곤장을 때리는 형벌이 존재했고요.

이때 거의 죽을 만큼 때리거나 아마도 맞아서 죽은 사람도 많을 겁니다.

거기에 의자 앉히고 두 다리를 밧줄로 꽁꽁 묶은 다음에 가랑이 사이에 긴 나무막대를 넣고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이른바 주리를 틀어 사람에게 형벌이라는 고통을 주었다지요.

죄인들이나 죄수에게만 행해지면 그나마 괜찮은데 억울한 사람이나 누명을 쓰고 당하는 일도 많았을 겁니다.

100% 죗값이라면 동정의 여지는 없을 겁니다.

 

다시 군대의 체벌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삼국지를 읽다 보면 이곳 역시 사람을 때리는 형벌인 태형이 자주 나오고요.

적벽대전에서 화공 작전을 감행하려 주유에게 자청해서 살이 터지게 매를 맞은 황개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고육지책[苦肉之策] 또는 고육계[苦肉計] 세상을 속 일정 도의 위력이 있어야 조조의 눈을 속일 수 있는 계책이지요.

36계 중에 34계인 고육계이다.

장비의 마지막 운명도 심한 매질에서 죽음을 자초한 일이지요.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음 은 함께하자고 도원결의로 맹세한 형제 관우의 죽음에 이성을 잃은 장비의 행동이 비극을 불러온 것이지요.

자신의 부하에게 목이 잘리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것입니다. [장달과 범강]

[여기서 잠깐... 삼국지 내용을 인용하면 댓글에 그것은 뻥이다 하시는 분이 계신데 뭔가 큰 착각 속에 계신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저도 다 알고 있습니다,삼국지연의는 후에 나관중 작가께서 지어낸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나는 소설 속의 내용을 말하는 것인데 누가 중국 역사의 정사를 갖다 맞추는 일은 정중히 거절합니다]

 

우리의 군대는 창설이래 1980년 신군부가 등장하면서 이전의 군 시절에 매타작은 전설이 되었다.

물론 본인도 여기에 해당이 된다.

군이란 단체에서 왜 몽둥이 질이 성행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통제가 비교적 쉬웠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 사병의 절반은 무학자에 문맹률이 높아 자신의 이름 석자도 제대로 쓰지 못했으며 휴가를 보낼 때도 인사계나 담당자의 인솔이나 안내가 있어야 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가 아닌가 생가해 본다.

전쟁 직후에 강제 징집되고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 누가 편한 마음으로 국가의 부름을 받아들이겠는가?

이런 무리들을 통제 통솔하려니 매타작이 최우선이었을 것이다.

매 앞에 장사 없다고 하지 않던가?

오죽하면 야간 점호 시간에 어차피 맞을 매 빨리 맞고 잠드는 것이 더 편한데 새벽 시간에 두드려 맞는 일은 불안감에 편한 잠자리가 어려웠을 것이다.

 

무더위가 막바지에 달하는 8월의 어느 날에 정문 위병소에 방문객이 찾아 들어오셨다.

아들 면회를 신청하신 부여 출신의 상병 최*수 부모님이 오셨는데 부대 안이 발칵 뒤집혔다.

사병의 부모가 면회 오면 그대로 접수하고 외출증 하나 끊어주면 되는 일인데...

하필 전날 저녁에 엄청난 매타작이 있었는데 그 병사가 초주검이 되어 의무실에 아니 우리 내무반에 끙끙 앓으며 누워있었으니 큰일이 아닌가?

결국은 면회가 불가능해서 거짓말로 전방으로 훈련을 떠났다고 달래서 보냈다.

1977년도 당시는 전화도 교통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으나 부여에서 평택이 그리 먼길도 아니고 부모가 자식 보고자 찾아왔건만 영문도 모른 체 무거운 발길을 돌리셨다.

매타작의 이유는 이러했다.

물 하사 놈이 계급은 높지만 짬밥의 시간이 짧아서 상병 계급 아래 그래서 항상 부딪히며 시끄러웠다.

순둥이 병사 최상병이 타깃이 되어 전날 밤에 화장실 뒤 공터에서 대표로 뒤질 만큼 얻어맞은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손바닥 한번 안 맞고 졸업한 모범생이 본인이었다.

숙제 검사에서 남녀 구분 없이 거의 절반이 날마다 손바닥을 내밀어 회초리를 맞았다.

문제가 틀린 것도 맞을 일이고 아예 숙제 자체를 해오지 않아서 매를 버는 아이들도 많았다.

그 외 교내에서 하지 말라는 행동을 해서 회초리를 버는 아이들이 많았다.

6학년 2학기 가을로 기억하는데...

학교 끝나고 몇 명이서 집으로 가지 않고 한 곳에 모여 딴짓을 모의했다.

나는 겁쟁이 바보라서 핑계 대고 빠져나와 집으로 달려갔다.

다음날 오전 전교생 조회시간 담임선생님 얼굴 표정이 무거워 보이신다.

교장 선생님 훈시가 끝나고 담임 최*열 선생님이 몽둥이를 들고 교단에 올라섰다.

잠시 마이크에서 친구들 이름이 호명되는데 이상하게 어제 모였던 친구들 4명의 이름만 부르신다.

순간 아차차 뭔가 일이 잘못된 것을 짐작했다.

전교생이 천명이 넘는데...

드디어 매타작이 시작되었는데 선생님 표정에 감정이 실려서 죽을힘을 다해 내려치신다.

사과 먹다 배탈이 나면 몽둥이가 약이라 신다.

이유는 이러했다.

내가 빠진 후 이들은 사과 과수원에 서리하러 들어갔다가 한 친구가 잡혀서 모두 이름을 말했다 한다.

그 과수원은 우리 학교 육성회장님 소유의 농장으로 우리 동창생 신*석의 아버지이신데 이분이 담임 선생님께 아주 불쾌한 마음으로 한마디 하신 것이 매 타작의 시작이 된 것이었다.

몇 년 전에 당사자 친구를 동창회에서 만나 당시의 이야기를 하면서 한참을 웃었다...

 

미운 자식은 떡 하나 더 주고 고운 자식은 매로 다스리라고 했습니다.

이런 매는 사랑의 회초리 일 것입니다.

회초리 이상의 매질은 상처를 주거나 남길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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