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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나는 시골이 좋았다 [179] 본문
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T스토리입니다.
방문해 주신 모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초등학교 6학년 어느 날 흘러가는 흰구름을 보며 깊은 한숨과 함께 나의 삶을 생각했다.
졸업하면 공부는 끝이고 땅이나 파고 지게 지고 풀 베고 나무하러 다녀야 한다.
짧은 배움으로 도시에 나가는 일은 모험이며 고생길이고 그냥 농사꾼으로 남고 싶었다.
직접 몸으로 부딪혀 보기 전에 주눅이 들어버렸다.
남들은 서울로 대전으로 가지 못해 안달이 나지만 어차피 같은 고생이면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1969년 초여름 어느 날에 모친께서 급하게 부르신다.
오늘 밤에 대전에 가야 한단다.
경천에서 공주를 경유해서 유성을 지나 대흥동 터미널까지 밤늦게 비포장 도로를 달려 도착했다.
다음날 아침에 대흥동 소재 동방 염직이란 공장에 나는 내리고 어머니는 집으로 가셨다.
이공장은 염색 공장으로 당시에는 대부분이 청바지 원단을 염색했으며 기타 여러 의류[자세한 기억이 안 남] 원단을 색을 입혀 출하했다.
공장의 일면을 보면 시작단계는 원단을 풀어 물에 담근다.
몇 번을 넣었다 옮기고 하면서 갖가지 색으로 물들어간다.
그 후 방향을 우측으로 돌면 1차 건조기인 원형통을 감아 돌아 내려오면 다시 2차 건조가 시작된다.
이곳이 마지막 공정으로 건조기의 길이가 길다.
원단 1 롤의 길이는 여러 묶음으로 들어가서 마지막에는 처음의 길이대로 절단하여 포장한다.
내가 맡은 자리는 마지막 단계인데 맨 앞의 기술자가 절단되는 부분이 들어가면 부저를 눌러준다.
그러면 그 소리를 듣고 원단이 나오면 손으로 잽싸게 잡아당겨 끊어야 한다.
완전 수동이며 숙달된 사람이 해야 하는데 생전 처음 보는 기계 앞에 한 번의 설명으로 실행하려니 실수가 반복되고 그냥 넘어가면 심하면 발길질이 날아오고 건조기의 열기에 이마에 땀방울이 방금 염색이 끝난 원단에 한 방울만 떨어져도 불량으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 공장장 이하 층층시하의 잔소리에 죽을 지경이었다.
며칠은 그런대로 참고했지만 도저히 감당이 안되어 탈출을 계획한다.
종료시간도 내가 마지막이다.
아마도 30분이나 1시간 더 늦게 끝나게 된다.
이종 사촌형님이 함께 근무하지만 얼굴 보기도 어렵다.
한 달 근무하면서 휴일도 거의 없었으며 날마다 야간작업처럼 되었다.
이를 악물고 참고 참았다.
드디어 월급날이 되었다.
작업이 종료되고 월급봉투를 받았다.
1969년 7월인가 그즈음에 경부 고속도로 서울 대전 개통 소식을 들었다.
당시의 월급액은 내가 약 2,300원으로 기억한다.
야간작업이 별로 없었던 사람은 2,000원 정도였으며 공장장이 7,000원 정도 받은 걸로 들었다.
밤새 잠들지 않고 소지품을 챙기고 새벽 4시경에 공장 쪽문을 열고 골목길을 내달렸다.
고향으로 가는 차편을 몰라서 그날 오후 늦게 집에 도착했다.
약 3년이 지난 어느 날에 무언가에 홀린 듯 동년배의 사돈이 취직자리 하나 좋은데 있다 가고 가보자 한다.
서울 뚝섬이라는 동네인데 메리야스 원단[흰색 천]을 만드는 일종의 방직공장 비슷해 보였다.
오후에 가방 하나 들고 면담이랄 것도 없이 들어섰다.
당장에 야간 근무하란다.
수십여 대의 직조기가 쉬지 않고 돌아간다 아니 움직인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세상에 생초보인데 설명 없이 기계 앞에 세워놓고 잘 돌아가는가 하고 지켜보란다.
밤 10시 조금 넘은 시간에 조장이란 놈이 부르더니 지랄 발광을 해댄다.
이 기계가 실뭉치 하나가 끊어져 불량품을 길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뭘 알아야 조치를 하든가 보고를 하든가 할 것인데...
동료 한 명이 다가오더니 심한 전라도 사투리로 몇 살이냐고 묻는다.
사실대로 말하니 나보다 3살 아래인데 입사 선배라서 자기에게 존댓말 하란다.
자정에 라면 인가 빵인가 뭐 하나 먹고 화장실 다녀오고 다시 새벽 6시까지 완전 날밤을 새웠다.
숙소에 들어오니 라디오에서 이용복의 그 얼굴에 햇살이란 노래가 흘러나온다 [당시 최고의 유행가.]
눈 감 오면 저 멀리 서 다가오는 ~~~
아유 졸려 죽겠다 하지만 모두 아침 식사하러 간사이 소지품을 들고 담을 뛰어넘었다.
도저히 내 체질은 아니었다.
다시 논밭으로 나갔다.
날이 더워서 그렇지 자유다 자유를 외치며 냇가에서 수영도 하고 그늘에서 낮잠도 즐기며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도 보내니 여기가 천국이다.
다시는 도시로 공장으로 안 갈 것이다.
나는 시골에서 평생 농부로 살아갈 것이다.
내 체질이 흙을 밟아야지 감옥 같은데 갇혀서 평생을 보내기는 싫었다.
머슴을 살더라도 시골에서 아니 고향에서 뼈를 묻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1년 후 반 강제로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1971년 4월 초에 떠난 내 고향 경천의 흙내음을 간직하며 언젠가는 땅을 밟고야 말겠다는 꿈을 간직하며 40년을 도시에서 지냈다.
드디어 2010년 12월에 충북 괴산에 그림 같은 시골마을에 터를 잡았다.
나는 무슨 일을 하든 하늘을 보고 일을 해야 한다.
운동도 그렇고 하늘이 가려진 지붕 아래에서 하는 일은 남자가 할 일이 아니다.
취미 아닌 등산 활동도 하늘이 보여서 더욱 좋았다.
그러니 농촌에서 농사짓는 일은 나의 천직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너무 늦은 나이에 시작해서 모든 것이 어려웠으며 의욕상실이 더 큰 문제였다.
나이가 젊었다면 패기 하나로 도전을 했을 텐데...
고향의 흙냄새를 그리워한 세월이 40년이 지났으니 모든 것이 옛날의 시골이 아니었다.
귀촌도 아니고 귀농도 아니고 애매한 그냥 시골살이로 말하고 싶다.
문제는 이제는 혼자가 아닌 둘이다 아니 가족 모두의 의견이 반영되고 합의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으며 시골살이가 도시보다 돈이 더 필요했던 것 같다.
첫째는 일정 수입이 없고 소비만 있으니 더 어려웠고 희망보다 실망이 찾아들며 나 자신의 나이를 인정해야 했다.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현실 앞에 망설일 여유도 없었으니 자신의 행동이 원망스러워진다.
어린 시절 단순하게 시골이 좋고 흙내음이 좋다고 저절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무모하게 아니 무작정 시행에 옮기다 보니 맨주먹이 문제였다.
돈, 돈이 없다 없어도 너무 없었다.
시골에 살아보니 귀촌이란 촌으로 이사 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갈 능력이 있어야 한다.
연금이라든가, 임대수입이라도 아님 현금을 가방 가득하게 넣고 여유 있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시골 노인들의 한마디에 큰 상처를 입었다.
집도 절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동네 일을 맡기느냐고요.
사람의 능력보다 돈이 많아야 믿고 본다는 논리이지요.
그러니 내가 아무리 똑똑하고, 정직하고, 떳떳해도 가진 게 없으면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이사 후 1년 뒤 돈 많은 친구가 새로 집을 짓고 정착합니다.
부인 없이 홀아비도 아니라는데 그냥 떨어져 산다네요.
돈이 많으니 첫인사부터 대단하고요.
술 한잔 들어가면 말끝마다 뼈 있는 소리만 해대고 다닙니다.
저는 상대적으로 주눅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귀촌은 돈이 많고 봐야 해서 저는 귀농으로 생각했지만 역시나 더 어렵고 힘들어서 그냥 시골살이라 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직장 생활은 선천적으로 맞지 않고 장사 또한 체질적으로 못합니다.
도시든 시골이든 돈을 벌어야 먹고사는데 걱정입니다.
돈이 조금 있어도 맨날 놀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안 되는 일이 있으면 당연되는 일도 있다고 합니다.
새로운 환경에서 열심히 노력하고 부지런하게 살다 보면 희망이 보일 것이다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아주 성공적이었고요.
지금은 작은 만족감으로 부족함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귀촌이나 시골살이를 원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적극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가난한 분만 [경제적으로] 해당이 되오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대 환영이며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물론 약간의 고생길은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세상에 그냥 거저 되는 일은 없거든요.
의사는 치료에 도움은 줄 수 있지만 죽고 사는 일과 건강한 몸은 본인이 하는 것처럼요.
저도 길라잡이는 자신하지만 본인의 노력과 정신력이겠지요.
다음 편에는 귀농 편이 이어집니다.
제가 직접 겪은 일과 소중한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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