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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이발소와 머리깎는일 [143] 본문
최인태의 세상이야기 블로그입니다.
찾아 주신 모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이발 이야기입니다.
머리 깎는 일이지요.
몇10년만 일찍 태어났으면 상투머리 하고 살았을 텐데요.
전후 세대라서 상투는 면했지만 까까머리 아니 박박 머리였습니다.
머리카락 속의 벌레 이를 잡기 위해서는 박박 머리가 가장 좋았을 겁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 시원하게 하얀 밀가루 같은 거[DDT] 디클로로 디페닐 트 리글로로 에탄의 약자로 우리 나이에는 아주 익숙한 단어입니다.
당시에는 남녀 가리지 않고 머릿니가 많았습니다.
모든 게 부족하고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지요.
의약품의 부족도 문제였지만 위생이나 생활환경의 모든 것이 어려웠던 시기이기도 하였답니다.
아버지는 이발기를 여러 개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우리 집은 13 식구가 한집에서 살았습니다.
그중에 남자는 9명이었습니다.
집에서 직접 머리 깎는 일이 가성비가 아주 좋았던 것이지요.
어린 시절 친구들의 머리 모습을 생각해보면 모두가 비슷한 박박 머리였고요.
몇몇의 부잣집 아들은 상고머리였지요.
아주 부러운 헤어 스타일이었답니다.
우리 동네 하고는 행정구역이 다르지만 논산군 연산면의 국사봉 아랫마을에 어른들은 상투를 하고 장가 안 든 총각이나 아이들은 댕기머리를 길게 하고 한복을 입고 살았습니다.
이들은 우리 동네에 장이 서면 그 머리 그 복장 그대로 장에 돌아다닙니다.
잠깐이지만 댕기머리가 부럽기도 했습니다.
이발기로 머리 깎으며 울고 불고 하지는 안 했을 테니까요?
초등학교 앨범을 찾아보면 어디 절에 온듯한 느낌이 들지요.
삭발을 하면 비용이 거의 안 들어갑니다.
위생적으로도 아주 효과적이었고요.
비누칠을 안 하고 물만 묻혀도 크게 문제 될 일이 없었던 것이지요.
더구나 그 골치 아픈 머릿니가 자동으로 해결되었으니 말입니다.
한두 달에 한 번씩 가족 모두 머리 깎는 날이 다가옵니다.
마당 한편에 나무토막 의자에 앉으면 큰형이나 삼촌께서 이발기를 들고 옵니다.
우리 집은 대형으로 두 손으로 하는 이발기도 있었습니다.
머리카락이 짧거나 단정하면 고통 없이 끝나지만 길거나 소위 떡이 지면 머리카락이 잘리지 않고 거의 뽑혀나갑니다.
엄청나게 아프지만 말해봤자 주먹이 날아오거나 욕만 얻어먹을 뿐 변하는 것이 없답니다.
아마도 절반 가까이 뽑혔다고 생각할 때쯤이면 일어나서 머리 감으라고 합니다.
해방이지요.
어느 해부터인가 마을마다 다니면서 동네 남자들 전부 머리 깎아주는 아저씨가 나타났습니다.
이발요금은 보리 날 때 보리 한말 가을에 쌀 한말 정도였을 겁니다.
부모님께서 드려서 정확한 기억이 없네요.
그 아저씨한테 머리를 맡기면 절대 아프거나 울지 않습니다.
물론 이 아저씨도 박박 머리 스타일이었습니다.
동네 넓은 터 한구석에 낡은 의자 하나 놓고 거의 한나절은 하셨을 겁니다.
졸업 후 15살 추석에 어머니께서 이발요금을 주면서 이발소에 다녀오라 하더군요.
우리 동네에는 이발소가 두 군데 있었습니다.
아마도 지금도 있는 소방서 아래에 신원 이용원이 있었고요.
당시 1967년도 인가 기억은 가물 가물하네요.
어저께 고향 친구와 옛날이야기 하던중에 놀라운 소식을 들었네요.
당시 신원 이용원 어르신이 아직도 현직에서 일을 하신답니다.
90이 훨씬 넘으신분인데...
지금도 이발하고 면도까지 하신답니다.
코로나 잠잠해지면 한번 찾아 뵈어야겠습니다.
그분의 얼굴 모습은 하얀 가운 입은 멋진 분으로 기억이 나는데요...
장터 아래로 내려오면 담뱃집 아랫 편에 경천 이발관이 있었습니다.
저는 경천 이발관에 가보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더 위로 올라가서 신원 이용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난생처음 들어가 보니 주인아저씨께서 너는 누구네 집 아들이냐고 물으시네요.
선친의 성함을 말하니 고개를 끄덕이시면서 상고머리로 할래 하고 물으시네요.
기분이 아주 좋으면서 부끄러웠답니다.
19살 설 무렵에는 8대 2의 가르마를 타고 포마드[직코]를 바르는 헤어스타일도 해보았습니다.
당시 서울에 거주할 때인데 이화여대 앞의 대현동 고갯길[아현동 넘어가는]의 이발소였습니다.
24살에 군 입대할 때는 아주 면도날로 밀고 갔습니다.
당시에는 장발이 유행이라서 약 500여 명이 입소했는데 여러 명이 조금 길게 깎고 오거나 한두 명은 아예 긴 머리 그대로 왔더군요.
점심 식사 후에 막사 뒤편의 좁은 공간에 모두 집합시키더니 머리긴 사람 골라내더군요.
아직 명찰이 없어 이름은 못 부르고 작은 막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어깨를 내려치면 앞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잠시 후 피투성이의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기 좋은 말로 군기잡기이지만 분풀이 수준입니다.
입술 터지고 코피 흐르고 고통소리 들린다고 발로 밟아대고 한바탕 콩을 볶았습니다.
40대 후반까지는 서비스 좋은 동네 이발소에 단골로 다녔습니다.
한 번은 시간이 급해서 목욕탕의 이발사에게 맡겨보았다가 대 실망했습니다.
아~ 이 자식이 머리 부탁한다 하니 의자에 앉으라더니 너무 빨리 다되었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머리 감고 오랍니다.
홀딱 벗은 몸으로 온탕 냉탕 드나들고 머리 감으니 자리에 앉으라더군요.
면도 거품 바른 후 1분도 안 된 시간에 다했다고 다시 세수하랍니다.
그 후 혼자서 씻고 선풍기로 머리 말리고 요금을 물어보니 단골 이발소보다 더 받네요.
아~ 이런 다시는 안 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미용실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요금도 저렴하고 아주 짧은 시간에 만족합니다.
미용실은 면도 자체가 없어서 좋고요.
지금은 머리를 감지 않고 드라이기로 날려줍니다.
5분도 안 걸리는 초스피드가 아주 마음에 듭니다.
계룡산 기슭의 신원사, 갑사 등 절이 가까워서 자주 놀러 가고 소풍도 갔습니다.
어느 날부터 젊은 스님들이 무서워졌습니다.
5,16 혁명 정부에서 전국의 깡패와 건달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합니다.
이때 이들은 머리 깎고 전국의 사찰로 숨어들었습니다.
이때 잡혀간 불량배들은 제주도의 산간 도로인 5,16 도로 건설 및 간척지 공사에 투입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과거를 숨겼지만 본성은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혁명 전에는 절에 가면 스님들의 미소가 부드럽고 인상이 좋아 보였는데요.
어느 날부터 중들의 얼굴이 공포로 다가오더군요.
그 후 고향을 떠나고 수십 년 후에 찾아갔을 때 그 시절의 중들은 안 계시더군요.
1970년대 장발이라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얻어맞고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고 정말 생각도 하기 싫은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는 두상이 남들보다 커 보여서 아주 긴 장발은 안 했지만 유행에 따라가려고 조금 길게 길렀는데 어느 날에 길을 걷는데 얼굴에 불이 번쩍하더군요.
평택경찰서 장형사 새끼가 머리 길다고 욕을 하면서 한대 올려 부친 겁니다.
이 새끼한테 불심 검문도 당해 보고요.
골목길을 걸어가는데 기분 나쁘게 손가락으로 부르더라고요.
담벼락에 세우더니 주머니 있는 것 다 내놓으라면서 한대 올려 부치려 하네요.
주머니 속에는 남자애들이 갖고 다니는 필수품은 아니지만 자그마한 주머니칼[당시 말로는 때끼 칼이었습니다]이 나왔습니다.
접이식인데 칼날을 빼더니 제 얼굴 대면서 말하네요.
이 칼의 용도가 무엇이냐고요.
애들이 무슨 용도가 있어 갖고 다니나요.
그냥 넣고 다닌다고 말하니...
이런 흉기를 소지했으니 잡아간다나 뭐라나...
울면서 매달려서 겨우 풀려나긴 했습니다.
1979년 군부대 동원예비군이 발령되어 5박 6일 입소했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창원 39사에서 훈련 및 교육을 받았습니다.
훈련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당시에는 월남 참전 병사들이 많았습니다.
교관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 직접 참전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말이 확실하다면서 참전 예비군들에게 교육을 대신 하라더군요.
이들은 전쟁은 해봤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아님 경상도 말이라서 그런지 잘 못 알아듣겠더군요.
한마디 기억에 남는 내용은 여자 베트콩을 사로잡으면 포로가 아니라 아주 돌림빵으로 해결하고 총살해버렸다는...
문제는 금요일 밤에 회식 후에 벌어졌습니다.
부대 막사 특성상 우리 막사와 장교급 예비군 막사가 붙어있었는데 날이 더워서 출입문을 열어 놓으면 서로 마주 보였습니다.
장교 막사는 사병들이 식사를 직접 갖다 주기도 하고 온갖 수발을 들어주더군요.
그런데 장교 예비군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깎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헤어스타일이었습니다.
우리 병급 예비군들은 입소 전이나 입소하는 날 위병소 한편에서 머리를 자르고 입소를 했는데.
회식하느라 한잔 술이 들어가니 목소리가 커집니다.
저 새끼들 두드려패버리자고 말입니다.
저새끼들 장교라고 머리도 길고 같이 근무할 때 우리를 힘들게 했으니 오늘 원수를 갚아 보자 하니 모두 동조를 합니다.
그러더니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먼저 들어가서 저쪽 막사의 두꺼집 스위치를 내려서 불이 거지만 모두 들어가서 작살을 내자고요.
잠시 후 정말로 뛰어 들어가더니 불이 꺼지고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5분도 안돼 부대 사이렌이 울리고 5분 대기조와 헌병들이 들이닥치네요.
그날 잘 해결되어 토요일 출소를 했습니다.
머리가 짧으려면 장교나 사병이나 같아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네요.
이발을 하면 일주일이 행복하고.
목욕을 하면 한 달이 행복하고.
결혼을 하면 평생이 행복하다는 어느 액자의 글귀가 생각나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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