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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동학 농민군과 경천 장터(11) [144] 본문
최인태의 세상이야기 블로그입니다.
찾아 주신 모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의 짧은 주둔지였던 경천리 일원의 옛이야기를 유추해봅니다.
주둔지는 경천 장터 마당이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경천 3구인 등정골과 수랭이 골은 매복 및 훈련장으로 사용되었을 겁니다.
저의 기억에도 한아름이 넘는 참나무 군락이였으니까요?
참고로 등정골은 계룡면 경천 3 구지만 수랭이 골은 상월면 지경리입니다.
1960대 중후반으로 당시에는 상수리를 주워서 묵을 만들어 먹을 때입니다.
불쌍하게도 참나무 밑동은 나무망치로 두들겨 맞아서 커다란 상처를 가슴에 안고 서있었습니다.
아직 나무에 달려있는 상수리 열매를 떨어트리려고 메라고 불리는 나무망치를 사정없이 두들겼을 겁니다.
아침저녁에 멀리서 들리는 둔탁한 소리가 참나무의 고통이었네요.
상수리 열매도 주인이 따로 있어서 아무나 함부로 주워가지 못했습니다.
참나무 군락지는 나무의 그늘에 가려 땅에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했습니다.
맨땅 위에 떨어지는 상수리는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주워갔습니다.
작은 열매였지만 이것은 돈이 되었답니다.
도토리 묵으로 불리는 상수리 열매로 만든 묵은 경천 장마당에서 판매되어 돈으로 바꿨을 테니까요?
등정골과 수랭이 골은 괘등산 남쪽 양지바른 곳이고요.
저는 괘등산 정상을 기준으로 12시 방향인 북쪽으로 경천 2구 성밑 마을에 살았습니다.
다롱고개 올라서다보면 우측으로 오르면 고갯길이 나타납니다.
수랭이 고개라 불렸으며 이곳을 넘어서야 참나무 군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조부님의 천수답은 등정골 입구의 야트막한 오르막에 몇 다랭이가 있었지요.
비가 내리지 않으면 하늘만 쳐다보고 늦게라도 비가 내리면 온 식구들이 달려가서 호미로 비 맞은 땅을 파고 모내기를 하였습니다.
농민군의 후방이 등정골이었다면 전방의 선봉대는 구비안 작은 언덕 넘어의 삽작골이었답니다.
지금은 삼남대로의 한구간인 어사길이 시작이 되는 작은 동네였습니다.
경천지역은 계룡산의 맑은 물이 풍부하게 흘러서 멀리 상월면과 노성면까지의 황금 평야를 살찌웠습니다.
황새울과 건너편의 금띠 마을 사이에도 기름진 옥토가 이어져있습니다.
농민군은 공주에 있는 충청 감영[우금치]의 공격을 앞두고 군량미 보급과 조달이 비교적 쉬웠을 겁니다.
입즉백산[立卽白山] 좌즉죽산[座卽竹山] 농민군들의 복장이 흰색 바탕이었으므로 서있으면 하얗게 보이기에 흰 산이라 불렀으며 자리에 앉으면 죽창[竹槍]만 보이기 때문에 대나무산이라 했다는군요.
1894년 10월 26일 여러 갈래의 농민군들이 경천으로 집결하여 재 정비 후 공주의 충청 감영으로 진격 준비를 했습니다.
당시에는 23번 국도가 만들어지기 전이라서 호남에서 한양으로 올라가는 길목[삼남길]이며 경천 역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던 곳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동향인들은 지금의 구 23번 국도길 상월면 사무소에서 군계 다리를 건너고 하마루를 지나 금띠 마을 지나서 계룡면사무소까지의 길을 떠올릴 겁니다.
이 길은 자동차가 다닐 수 있게 만들어진 신작로 길로 걸어서 다니는 길은 아닙니다.
지난번에 언급했듯이 삼남길로 신작로가 만들어졌다면 지금의 경천은 큰 도시로 발전했을 겁니다.
경천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내 고향의 역사적인 사실과 아픔을 전혀 알지못했던 사람이었네요.
그 후 6 25 전쟁의 상처와 고통도 모르고 자란 철부지였음을 인정합니다.
지금의 장터는 지난날의 영광과 상처를 아우르며 아직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고향을 떠난 출향인[出鄕人]으로 지금의 경천 모습에 많은 아쉬움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넓은 농토와 삼남길의 주요 길목이며 경천장의 물동량 역시 대규모였다고 전해집니다.
일찍 자리 잡은 교육기관[초등교와 중학교]과 전기를 공급해주는 변전소 그리고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경천 교회가 있습니다.
계룡산의 그늘인지 치국산의 이름이 治國인지 恥國인지 역사는 알고 있을 겁니다.
관악산의 기세가 불의 형상이라서 한양과 경복궁의 화마를 막기 위해 산중에 연못을 만들고 소금 항아리를 산에 묻었다고 전해집니다.
아마도 전국의 여러 산중에 이런 이유로 묻힌 소금 항아리가 많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치국산 산중에 소금 항아리라도 묻어 두었으면 더 발전된 모습이 아니였을까 조심스레 생각에 잠겨봅니다.
죽창 하나만 들고 부적을 읊으며 달려 나간 농민군들의 절규가 경천 장터를 지나 우금치 고개까지 울리고 있는 느낌입니다.
총으로 무장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거의 맨손과 투지만 가지고 대항한 그날의 함성은 거의 130년의 시간 속에 잊히고 있습니다.
역사의 진실은 어두운 면도 밝은 면도 모두 포용하며 영광과 아픔도 간직해야 할 것입니다.
경천역 해설판의 위치와 그 옆의 시혜비 선정비등은 아주 잘못 세워진것입니다.
원래의 그자리에 있어야 유물과 역사적 가치가 있을줄 알고있습니다.
지금의 경천 중학교 교문앞 길건너편에는 더 많은 비와 비석이 있었던걸로 기억됩니다.
이것이 도로가 확장되면서 옮겨간것 같은데...
바로 위에 삼남길중에 어사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서있던 이문[里門]터 역시 흔적조차 찾을길이 없네요.
경천역의 위치는 알수가 없지만 그래도 그 길목은 찾아 해설판의 위치를 이전해야할것입니다.
전혀 다른 샛길인 이곳에 존치되면 후손들은 이길이 그길인지 혼동할것 같네요.
지금의 자리는 다리가 만들어지기전에 집터입니다.
팽나무 옆으로 초가집이 두채가 있었습니다.
경천 장날이면 이른바 곡물 장꾼들이 몰려와서 선점을 하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첫번째 집은 제 친구가 여러형제들과 살았으며 그 옆집은 본인의 숙부님댁이였습니다.
지난번에 언급했던 경천리 팽나무자리이기도 하구요.
역사를 바로 잡지 않으면 올바른 가치를 후손에게 알려줄수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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