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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마을 양화리 [324] 본문

오늘의 이야기.

고향 마을 양화리 [324]

현덕1 2025. 2. 5. 09:14

최인태의 세상이야기 T 스토리입니다.

방문해 주신 모든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양화리는 저수지와 신원사라는  사찰 그리고 계룡산을 품에 안은 넉넉한 마을이다.

양화리의 지명은 양화산성[陽化山城] 지금의 치국산성[治國山城]에 비롯되었다고 한다.

양화리는 저수지 아래 옛날 물레방아 터에서 우로는 치국산 정산으로 향하고 좌로는 쇠봉 능선을 타고 음청 고개를 지나 감바위산으로 넘어 보목고개를 지나 계룡산 연천봉으로 이어진다.

다시 문필봉과 관음봉 쌀개봉을 지나 정상인 상봉,천황봉,천왕봉을 찍고 다시 남릉길로 내려선다.

상월면 상도리와 경계를 맞대고 지방도 691번을 넘어 작은 능선길로 올라 치국산 정상까지 이어진다.

 

1967년에 완공된 경천 양화저수지이다.

저수지의 유역 면적은 100% 양화리에 있지만 지명은 경천 저수지라고도 부른다.

저수지에서 위로 약 1,5km 올라가면 천년 고찰 신원사가 나온다.

양화리는 저수지와 사찰 그리고 계룡산의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양화리는 저수지가 완공되기전의 추억이 더 많이 있다.

1967년 완공후 3년이 지나서 나는 고향을 떠났다.

그후 가끔 들러 보았지만 어릴적의 기억이 더 선명한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내내 봄가을 소풍은 신원사 계곡이였으니 그럴만하다.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양화리 마을은 지금의 물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다.

가을이면 감나무에 감이 주렁 주렁 매달려 있었으며 방앗간의 발동기는 힘차게 돌아갔다.

마을입구에는 양화리를 알리는 표지석이 서있었다.

신원사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물줄기도 마을 앞으로 흘렀다.

마을 주민 모두가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주 했다.

일부는 고향을 떠나기도 하였으며 가까 마을로 이사한 집도 많았다.

대부분이 지금의 신원사 앞 마을로 이주한것으로 알고 있다.

 

신원사는 동학사,갑사와 함께 계룡산 3대 사찰로 계룡면 양화리에 소재한다.

이절은 백제 의자왕11년 [651년]에 보덕화상이란 고승이 창건하고여러번의 중창을 거치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후 현재의 위치에 세워진 것이다.

우리에게는 어린 시절의 추억과 부처님의 근엄한 모습이 떠오르는 장소이다.

본인의 기억으로는 지금의 경내 모습에 많은 차이가 있다.

1963년부터 신원사로 소풍을 다녀온 추억이 서린 장소이다.

봄 가을 소풍을 두번이나 해마다 다녀왔다.

물론 6학년 1학기는 노성산의 금강대라는 곳으로 다녀왔으며 5학년 2학기때는 갑사로 원정 소풍을 다녀왔다.

그리고 몇번 소풍에 참여하지 않했다.

신원사의 스님들의 얼굴 모습도 떠오르는데 인상이 너무 험악해보여서 우리는 무섭다고 도망다기도 했다.

이시기는 박대통령의 혁명 정권으로 이기붕을 비롯한 정치 깡패들의 소탕이 끝난후였다.

혁명 정부는 정치 깡패 뿐만아니라 사회의 불량배등을 모두 잡아들여 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하거나 제주도의 516 도로 개설 작업에 동원할때였는데 이때 일부 폭력배들이 전국의 절간으로 숨어 들어 가짜 승려행세를 할때 였다.

어느날 갑자기 승복을 입고 머리를 밀었으니 가짜 중이 틀림없었다.

이들을 받아 들인 부처님도 고민은 많이 하셨을듯하다.

 

현재 신원사 전체의 모습이 나의 기억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화재로 소실 되었는지 아님 오래되어 허물어 졌는지 모르겠다.

마을에서 건너오는 세심교 다리 오른편에도 사찰 건물이 1동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신원사의 경내에는 중악단이라는 웅장한 건물이 한채있다.

묘향산의 상악단 계룡산의 중악단 지리산의 하악단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신원사의 중악단은 1394년 [조선태조3년]의 산신각이였으나 후에 계룡단[鷄龍檀]이라 하였으나 고종때 묘향산과 지리산의 산신각을 각각 상악단과 하악단이라 하였다.

두 산의 사이에 있는 계룡산 산신각을 중악단[中嶽檀]이라 하였다.

1651년 [효종2년] 에 철거되었다가 1879년[고종 16년]에 명성황후가 다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원사는 우리에게 소중한 추억의 장소였으며 어린 시절의 꿈리 서린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때는 국립 공원이라해서 입장료를 받을 때가 있었다.

저 아래 주차장 옆에 매표소를 세우고 돈을 내지 않으면 입장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다시 노무현 정부에서 입장료를 폐지 하였으나 사찰에서 문화재 보호를 이유로 다시 문화재 관람료를 받고 있었다.

동학사는 건너편의 산이라 모르겠지만 갑사와 신원사는 계룡산이 국입 공원으로 지정되면서 인근 부락의 주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식재 사업을 벌였다.

1960년 대 후반에 시작된 나무심기 사업으로 지금은 울창한 수림에 하늘 높이 치솟은 나무를 바라보며 그날의 고생을 보람으로 생각했지만 절에서 돈을 내고 들어가라해서 기분은 좋지 않았다.

원님 지나가라고 길을 만들어 놓으니 문딩이 가 먼저 지니간다더니 그말대로 나무 심어 가꿔놓으니 돈내고 들어가라 이것은 칼만 안들었지 도둑넘 아니 날강도 짓이 아니였던가?

중생을 구제한다는 부처의 말은 공염불인가?

지금도 돈을 강탈하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두절의 이름만 들어도 유감이다.

 

그후로 계룡산을 등산할때 나는 묘책을 사용했다.

전날밤 10시경에 신원사의 주차장에 도착한다.

차에서 1박을 하는데 새벽 4시 정도에 기상해서 이마에는 헤드랜턴을 달고 산에 오르기 시작한다.

이때는 모두가 잠든 시각이라  입장 요금을 받지 않는다.

지나가면서 느끼는 점은 한사람이라도 밤새워 여기 근무한다면 나에 입장요금을 받아 챙길 텐데 하긴 지들도 사람인데 잠은 자야 겠지....ㅠㅠㅠㅠ..

암튼 공짜로 들어가니 그 옛날 가설극장 돈 안내고 도둑 입장할 때의 쾌감이랄까?

연천봉에 도착하면 날이 밝아온다.

저 아래 고향의 들판을 바라보며 아침 식사를 한다.

발아래는 조선 초기의 정압사[鄭壓寺]인 등운암을 바라보고 저멀리 상봉을 바라보며 옛날 이야기에 심취해 본다. 

 

양화리에는 여러 지명이 있다,

능산 그리고 보목,안쇠실과 밖쇠실 양화지라 부르는 작은 방죽을 따라 올라가면 연애골이 시작된다.

예전에는 이길이 연천봉까지 이어졌지만 지금은 공원 관리 차원에서 폐쇄한 것으로 알고있다.

양화리 마을은 수몰전에는 지금의 물속에 수십 가구가 옹기 종기 모여 있던  그림 같은 마을이였다.

마을 입구에는 연자방아가 아마도 그대로 수몰된것 같다.

당시에는 이것을 소중하게 여겨 어디로 운반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유는 당시 중장비가 없었고 굳이 힘들게 옮길 이유도 없었다.

그래도 집을 헐고 석가래나 대들보 같은 목재는 땔깜으로 사용하려 가져 갔지만 그외 대부분은 그대로 수장 됐을것이다.

제일 중요한 푸세식 화장실이 대표적일것이다.

1967년 담수 첫해에는 저수지 근방에 사람이 다가가기 힘들었다.

지금도 기억속에 존재하는 그 냄새말이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냄새인데 아마도 수몰되기전에 온갖 부산물이 그대로 부패하면서 배출하는 일종의 화학적 가스일것이다.

 

5학년 어느날에 양화리 친구가 깜짝 놀랄 장난감을 들고 왔다.

아군의 총알인지 적군의 총알인지 당시에는 구분을 할수없어 모르겠지만 많이도 갖고 왔다.

그 친구는 마치 자신이 전쟁터에서 쟁취한 전리품인양 자랑이 대단했다.

우리는 순으로 만지면서도 무서웠다,

뾰족한 저 끝이 사람 몸에 박히면 그사람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당장에 죽일수 있는 총알이였던 것이다.

수몰지구의 집들이 이사를 가면서 목재는 땔깜으로 사용할려고 집을 허물었는데 6,25 전쟁 당시 사용하던 총알을 집안 어디에 묻었는지 일부러 감춘것인지 알수는 없지만 상당량이 출토된것으로 알고 있다.

이지역은 계룡산의 빨치산 토벌작전 할때 아니면 전란중에 남아있던 것으로 추정해본다.

그외 다른 무기나 총알이 더 있었는지는 본인은 알수가 없다.

며칠전에 당시 마을에 살던 친구와 통화를 했지만 더 이상 자세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상당히 아쉬운점은 당시의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보면 친절하게 알려주지만 솔직히 실망이다.

그친구들에게는 이글의 내용이 전혀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실 뭐 대단한것이 아니기때문에 본인 역시 강하게 어필하지도 못한다.

같은 시기 같은 세월을 살았는데 너무 대조적이라고 생각한다.

 

하마루 차부에 버스가 도착하면 사람들이 내린다.

서울 마님이나 대전의 마님들이 계룡산 산신령에게 불공을 드릴려고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내린다.

이때는 택시나 다른 이동 수단이 없어 여기서 부터 신원사 입구까지 십리 길을 걸어 가야한다.

이때 지게를 짊어진 짐꾼이 기다리고 있다.

양화리를 지나고 신원사를 지나야 이들의 목적지가 나온다.

짐꾼은 짐을 내려주고 다시 하마루까지 걸어온 길을 되짚어 가야한다.

겨울철이면 경천 사람들이 계룡산 정상부까지 올라가서 불에 탈수있는 나뭇가지나 억새등을 낫으로 잘라 지게에 지고 내려온다.

해질녘이 되면 나뭇꾼들의 행렬이 길게 이어진다.

저수지가 수몰전에는 그나마 길이 짧았다.

직선 거리로 걸어오기 때문이였다.

지금의 도로는 우회도로여서 빙글 빙글 돌아가는 길이다,

나뭇꾼들의 모습이 사라지면 양화리 마을에도 어둠이 내린다.

아직 달이 뜨려면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이유는 계룡산의 능선이 동쪽 방향을 길게 가로 막아서 아침 해도 저녁 달도 늦게 떠오른다.

어둠이 짙게 깔리면 계룡산 정상의  군부대에서 발전기 돌리는 소리가 적막을 깨운다.

발동기인지 발전기인지 암튼 천지를 울리는 소리가 아마도 논산읍내 까지도 들렸을것이다.

우리고향 마을의 하루가 이렇게 저물고 다음날 아침 날은 밝았지만 아침해의 밝은 모습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당시 양화리에는 복숭아 과수원이 몇군데 있었다.

품종도 모르겠지만 두 친구의 선친 께서  복숭아 과수원을 직접 하셨다.

계룡산의 맑은 물이 사철 흘렀지만 양화리는 논보다 밭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개울 주변의 흙은 진흙이 아니라 자갈이나 모래였다.

억겁의 시간이 만들어낸 퇴적층으로 만들어져있기 때문이다.

2025년 이제는 정부에서도 쌀 농사를 포기했다고 한다.

쌀소비가 안되어 재고 물량이 넘쳐 난다고 한다.

이제 양화리 마을은 저수지의 둘레길과 함께 신원사 그리고 계룡산 전체를 아우르는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

그시절의 흔적과 사람들 모두 기억의 저편에 존재하지만 고향의 그리움은 영원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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