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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거리 이야기 (2) [28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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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거리 이야기 (2) [287]

현덕1 2024. 6. 24. 16:41

최인태의 세상이야기 T스토리입니다.

방문해주신 모든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주막거리는 술과 음식을 파는 골목길 또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시장통이나 물동량이 많은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국에는 수많은 주막거리가 형성되었지만 지금은 지명과 그 흔적만이 남아있습니다.

주막집이라면 단순하게 술만 파는곳이 아니라 음식과 숙박등 일반적인 편의 시설도 포함됩니다.

교통이 발달하기전까지는 주막집은 술과 식사 그리고 하룻밤 묵어가는 방이 있으며  모두가 걸어서 이동하던 시절이였으므로 주막거리가 발달했을겁니다.

지금도 경북 예천에 가면 삼강 주막이 그대로 재현되어있습니다.

전국의 항포구나 큰 고갯길 초입 그리고 강나루터 주변으로 발달했을겁니다.

 

경상도 어느 산골 마을의 작은 주막거리가 있습니다.

사실 주막거리라고 부를 만큼은 아닌데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습니다.

술집이 한두개 인데 어떤때는 2집이 영업을 했으나 어느날 부터는 1집은 문을 닫기도 하였습니다.

영업을 안했지만 아주 그만둔것이 아니라 가을 걷이가 끝나는 시기에 다시 문을 열고 영업을 한답니다.

그러던 어느해 주막거리가 부산해집니다.

인근에 산판이 벌어진다고 소문이 파다합니다.

실제 못보던 젊은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당연 술집의 매상도 올라가고요.

하지만 산판은 그 특성상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이유는 거리도 있고 산을 오르내려야 하며 이들이 산에서 내려와 마음 편하고 술을 마실수 있는  처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산판의 모든 작업은 수작업입니다.

아무리 밑둥이 굵은 나무도 도끼로 찍거나 두사람이 마주 앉아 손을 밀고 당기는 대형 톱으로 나무를 베어야합니다.

중노동중에 중노동이며 이렇게 잘라진 나무는 다시 몇개 토막으로 자른후 사람의 힘에 의해서 한곳으로 모은후 산아래 내려보내야합니다.

산아래 넓은 터에 야적을 한후 트럭[도락꾸, 제무시]이 와서 실어 나르게 됩니다.

 

사실 산판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운 사람들입니다.

그중에는 탈* 병도 있을거구요.[지인중에 한사람있었음]

산판의 오야지 [사장]가 미리 관할 지역에 손을 써놓을겁니다.

왜냐면 정상적인 사람들은 너무 힘들고 이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 쉽지 않기도 하구요.

요즘 말하는 3d 업종보다 한참 더 위의 업종이기도 하구요.

그런 악조건에서 일할수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거구요

그러면 누가 그 험한 산판일을 한단 말입니까?

그래서 조금은 문제가 있지만 그들도 사람이고 가족이 있을테니 돈벌이라도 시켜야할겁니다.

그들은 주막거리에 오는 일도 쉽지 않기에 아마도 밀주를 담가 먹기도 하였을겁니다.

워낙 노동의 강도가 높아서 술 한잔이 누구 보다 더 간절했을테까요?

비가 내려 일을 못하거나 어쩌다 하루 쉬는 날에 주막집을 찾아오기도 하였을것이구요.

몇달 아니면 1년에서 2년 정도 머물다가 다른곳으로 이동해가거든요.

지금 처럼 나무가 많은 시절도 아니라서 깊은 산속으로만 찾아 들어갔을겁니다.

 

주막거리에 아침이 밝아옵니다.

새벽 댓바람에 주막거리에 나타난 영철이 아부지 입니다.

술은 좋아 하지만 아침 일찍 술을 마시는 그런 스타일은 아니셨거든요.

아마도 어젯밤에 부부 싸음을 했는지 아직도 분이 안풀린 모양입니다.

해장술에 취하면 부모도 못 알아본다 했는데 오늘 걱정이네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누가 잘못 걸리면 큰  싸움이 일어날것만 같은 그런날인가봅니다.

거기에 날마다 출근 도장을 찍는 미자 아부지도 나오셨네요.

두분이 동석을 하면서 한잔 두잔 취기가 오르면서 주막거리의 열기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합니다.

이양반들이 한집에서만 마시는게 아니라 건너편 집에서 가서 다시 마시기 시작합니다.

이제부터는 외상입니다.

모두가 얼굴을 아는 동네라서 술값 외상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요.

 

어느 봄날에 주막거리가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뒷산 자락에 저수지를 만드는 큰 토목공사가 시작된다네요.

당시에는 모든 공정의 거의 수작업이였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만 하였기에 인력도 많이 필요했으며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온답니다.

이분들은 숙소를 짓고 생활하거나 동네 한켠에 작은 방을 얻어 몇달이 아니 몇년 공사 기간내내 머물겁니다.

이분들이 마시는 막걸리나 술 또는 음식이 적지 않을거구요.

그래서 주막거리가 활기를 띠면서 웃음꽃이 피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문제는 다른곳에서 발생합니다.

입술이 빨간 여자들이 양산을 쓰고 다니면서 주막거리에서 장사를 할려고 돌아다는겁니다.

단순 술만 파는 주막집이 아니라 아예 술집 그러니까 색시집을 하는것이지요.

얼굴 곱상한  아가씨 몇명 앉혀 놓고 사람들을 불러모으는것이지요.

아마도 공사판의 월급날 정도는 상당한 매출도 예상되고요.

힘들게 일을 하고 찾아와 술한잔 거하게 마시고 여자들과 회포도 풀고 그간의 스트레스도 날리는 것이지요.

 

현존하는 삼강 주막의 이야기이다.

여름날에 찾으면 회화나무의 그늘이 더 반가운 지역이다.

매미 울음 소리라도 들리면 금상첨화이고 삼강 다리가 안보인다면 정말 과거로 돌아가보는 마음일것이다.[59번 국도]

얼마전에 삼강주막의 주인이셨던 고 유옥련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현재는 예천군에서 조금 다른 모습으로 재현해 놓았다.

현재의 모습도 중요하지만 그시절에 민초들의 삶이나 나루터의 생생한 모습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곳은 낙동강의 물줄기를 이용하여 배로 올라오는 최상류에 속한다고 봐야할것이다.

여기서 내린후 육로를 이용해야 한다.

물길은 더 이상 이용할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한양에서 육로를 이용하여 삼강나루에 도착하면 흘러가는 물길을 이용하여 쉽고 편하게 귀향길로 접어들게 된다.

문경새재가 열리기전에는 하늘재를 이용했으며 지금의 남한강 조정지 댐이 있는 탄금대에 도착하여 다시 배를 이용하여 한양에 도달할수가 있다.

 

현대식 도로가 개설되기전에는 국토의 남북을 잇는 대동맥이며 교통의 요충지같은 역할을 했을것이다.[영남에서 한양으로. 한양에서 영남으로]

이곳 삼강나루의 실제 모습이나 역할에는 별 관심이 없고 그져 술이나 마시고 부침개에 도토리묵이나 먹는 주막으로 여기에 알량한 사진 몇 장찍고 돌아간다.

주막집 또는 주막이라는 개념을 바로 잡아야할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삶과 애환 그리고 술에 얽힌 수많은 사연들 단순 술집만 있는게 아니라서 더욱 소중해진다고 생각된다.

대부분이 사람의 두발로 걸아야하던 시절이였지만  말타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었을테고 벼슬아치들은 가마를 타고 이동하기도 하였을것이지만 말입니다.

사람이 걷는 속도는 대략 아니 평균해서 약 4km라고 하네요.

이것도 평균치이지만 사람마다 아니면 지형이 조건에 따라 달라질것이다.

사람이 걷는 4km이면 10시간이면 40km 그러니까 백리길을 걷는 것이지요.

그시절의 사람들의 보폭이 넓었을것이고 하체가 발달해서 걷는힘이나 속도가 지금하고는 차이가 많았을것이다.

아마도 15시간 이상 걸었다고 예상하면 약 60km 열흘이면 600km 그러면 한양에서 부산 까지 아님 목포까지 원산이나 함흥까지 10일 이라고 계산하면 이것은 완전히 틀리는 셈법이됩니다.

 

이유를 들어볼까요?

지금 처럼 모든 길이 평탄하지도 않았으며 고갯길도 수없이 많았고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물길을 만났을때입니다.

뱃사공이 나를 기다리고만 있다면 그나마 수월했을겁니다.

아예 사공이 없는 강이나 물길도 많았을것이고요.

험한 산속의 고갯길은 어차피 한번에 넘어 가지 못하면 위험해서 일찌감치 주막에 머물기도 하였을 것이구요.

준비해간 짚신이 너덜해지거나 다리가 아프다면 걷는 속도가 현저하게 느렸을것입니다.

이때 만나는 삼강 주막은 사막의 오아시스였을것입니다.

배고픔에 끼니도 해결하고 고단 몸도 하룻밤 쉬어갈겁니다.

날씨가 도와준다면 조금은 빠르지만 혹서기나 혹한기 그리고 비가 내리거나 눈이라도 내리면 그 속도 역시 늦어질거구요.

 

주막거리가 북적이는 계절이 따로 있습니다.

조선시대까지는 장날을 이야기 하겠지만 근 현대에 들어서는 농산물을 수매하는 날일겁니다.

일제 강점기에 시작된 엽연초[담뱃잎] 수매할때 입니다.

이때는 그자리에서 아마도 현금을 지급 받았을겁니다.

목돈이 손에 들어오면 남자들은 당연하게 술집을 찾게 됩니다.

주막거리가 붐비기 시작합니다.

술한잔 마시고 그대로 집으로 돌아간다면 누가 뭐라합니까.

이런날은 도박 즉 노름꾼이 찾아 들어서 슬슬 작전을 펼칩니다.

결국에는 가진 돈 모두 잃고 허탈해서 외상술로 달래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지요.

 

오래전 mbc 방송국의 드라마 전원일기에도 몇 차례 방영이된 내용이 있습니다.

1년 동안 열심히 농사짓고 마지막은 벼 수매하는 날입니다.

소달구지에 경운기에 볏 가마를 가득싣고 수매장소로 달려갑니다.

당시에도 모두 현금으로 현장에서 지급합니다.

부부가 같이 왔다면 달라졌겠지만 여자들은 이곳이 오지 않았거든요.

주머니에 돈이 있으니 당연히 한잔해야지요.

주막거리가 다시 북적입니다.

여기서도 어디 가나요.

노름꾼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작전으로 돈을 잃어주는 척하면 모두를 끌어 들입니다.

결국 그날 밤에 빈털털이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지만 부부 싸움은 불보듯 뻔한입니다.

노름꾼도 주막집의 주모도 짭짤한 날은 분명하지요.

 

지금도 엽연초나 각종 농산물 정부 수매나 농협등 단체별로 수매현장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면 농협에서 벼와 건고추 수매가 이루어지더군요.

지금은 현금은 없고 모두가 통장으로 이체됩니다.

주막집은 없고 각 단체에서 따듯한 커피와 해장국은 준비해주더라구요.

예전에는 수매해서 받는 돈이 그해 농사의 거의 전부였을겁니다.

지금의 수매 대금은 일부분일테고요.

 

주막거리의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일명 방석집이 있구요.

그옆으로는 기생같지만 기생은 아니구요 기생 흉내내는 여자들이 대기하는 그런 술집도 있었습니다.

두집의 영업방식이나 손님 접대는 비슷한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엄연히 다릅니다.

방석집은 칸막이가 되어있는 방에 방석을 깔아두고 거기에 앉아서 술마시고 노래부른답니다.

그러니까 술따라 주는 여자는 있는데 주모 또는 나이많은 일명 퇴기[退妓]들이 일겁니다.

대목을 보려고 돈을 더 주고 젊은 아가씨들을 데려오기도 합니다.

대목이 지나면 떠나가구요.

가끔 정신 나간 사내들이 연정을 품거나 그 여자들의 웃음 한방에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일도 생긴답니다.

유부남일 경우는 골목길에 재미진 구경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답니다.[부부싸움으로]

 

이제는 옛날 이야기의 소재가 되었으니 세상은 무섭게 변했네요.

어린 시절의 기억이지만 어제 일같기도 하구요.

직접 경험해보거나 술집을 찾아 들어간적이 없어 실감나게 적지는 못하네요.

풍류따라 한잔 술에 떠나가는 김립선생이 제일 부러운데요.

술은 즐기지 못하지만 마음속으로 그리는 그 시절의 진짜 모습은 살아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