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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경천 주막 거리 이야기(1) [286] 본문
최인태의 세상이야기 스토리입니다.
방문해주신 모든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주막[酒幕]거리라는 명칭은 전국에 걸쳐 수많은 곳에 자리하고 있을것이다.
아마도 면이나 읍이 아닌 조금 큰 동네 어귀에는 틀림없이 주막거리는 거리가 있다.
도시에는 따로 특정해서 부르지 않아도 될만큼의 술집 거리나 골목길이 많이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는 주막거리는 시골이나 산골, 도서 지역의 작은 술집 거리나 골목의 말많고 탈많은 우리들의 작고 우정 깊은 이야기이다.
본인의 고향은 충청남도 공주군 계룡면 경천리이다.
제가 태어난 해는 1954년에 태어났으니 세상을 보는 눈은 그로부터 5~6년후 일것이다.
아마도 1960년대 초의 기억이다.
내가 살고 있던 마을은 용두천[갱변]을 건너 성밑 마을인데 이는 치국산의 양화산성 아랫 마을이라서 한자로는 성본[城本]이라 적었으며 사람들의 입에서는 성밑마을 발음이 충청도식 어법으로 변하여 셍미티라고 불렀다.
셍미티 마을에는 술집은 없었고 아주 작은 구멍 가게가 1곳이 있었지만 이내 사라졌다.
상월면 석종리 넘어 가는 다롱[달은]고개 초입에 사탕집이라고 부르는 초가집이 있었다.
사탕도 팔고 이것 저것 잡화도 팔았다해서 동네에서는 사탕집으로 불렀다.
아마도 그 이전에는 막걸리도 팔았을것으로 상상해본다.
하지만 엿을 만드는 공방이 있었다.
고물상을 같이 하는 곳인데 엿을 만들어서 지게나 손수레에 싣고 근동의 여러 마을을 돌아 다니며 엿을 주고 각종 고물 바꿔왔다.
경천은 장터 초입에서 중학교 교문앞까지의 약 300m 이상의 거리가 가게와 점포가 있어 거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경천은 장터 주변에는 막걸리와 주류를 파는 술집이 여러곳이 있었다.
주류 도매상을 하던 김사장님댁에는 소주를 담아 놓은 옹기[항아리] 그릇이 쌓여 있었다.
당시에는 다른 용기가 없어서 옹기로 만든 항아리[입구는 작은 구멍한개]는 빈 통이라도 무게가 상당했을것으로 보였다.
아저씨가 소주를 다른 그릇에 쏟을때 보면 맑은 물이 흘러 나온다.
어린 우리는 냄새가 없었으면 그냥 우물물 처럼 시원하게 한잔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주류 가게안에는 소주병과 그밖의 다른 종류의 술이 더 있던걸로 기억한다.
그 건너편에는 막걸리를 만드는 양조장이 있었으며 양조장 한켠에서는 직접 판매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아버지 심부름으로 주전자나 됫병을 들고 막걸리를 사러갔다.
충청도에서는 막걸리를 사러가는게 아니고 받으러 간다고 말한다.
장날에 쌀을 사러 가는데 입으로는 쌀을 팔러 간다고 말하신다.
어린 우리가 들을 적에는 반대의 표현이라서 지금까지도 가끔은 헷갈리기도 한다.
경천 양조장에는 몇번 구경은 했지만 자세한 기억이 없다.
술이 익는 소리라고 하던가?
꾸륵 꾸륵 꾸 꾸 꾸... 뽀글 뽀글 뽀글 뽀그르르...
그리고 아저씨 떠드는 목소리만 들려왔다.
술을 만드는 모든 그릇은 대형으로 아이들 눈 높이에서 쉽게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확실하게 생각나는 것은 완성된 막걸리를 담아 놓는 대형 그릇인데 이것은 항상 땅을 파고 김치 항아리 처럼 묻어 놓았다.
우리가 술을 사러가면 술도가의 아저씨는 손잡이 자루가 길다란 국자를 이용하여 술을 담아 올린후 그릇에 담아주셨다.
양조장 주변에서 기웃거리다 술찌꺼기인 [지게미]를 얻어먹기도 하였다.
이것은 처음 입에 대면 달콤한 맛이 느껴지며 술향도 풍겨온다.
달달한 맛에 이끌려 한참을 먹다 보면 어느새 취기가 올라오면 시원한 그늘에 잠시 눕기도 하였다.
경천 장마당안에는 날마다 술을 파는 술집이 몇곳이 있었으며 장날만 국밥과 술을 함께 파는 천막이나 칸막이가 몇곳이 더 자리했다.
대 부분의 술은 막걸리였을 것이다.
가끔은 소주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막소주라고 부르는 값싸고 질낮은 술도 팔았을것이다.
장날이 되면 일손을 멈추고 너도 나도 장으로 향한다.
당시에는 현금은 거의 없다보니 집에서 기르던 닭이나 염소 또는 보릿쌀 몇말이나 기타 잡곡을 들고 길을 나섰을것이다.
여자분들은 돈으로 바꾸면 곧바로 집안 살림에 꼭 필요한 물건을 구입했지만 남자들은 달랐다.
우선 달려가는곳이 선술집이나 장날 마련된 간이 술집 천막안으로 찾아 들어간다.
첫잔에는 웃음 소리와 정겨운 말소리가 들려오지만 오후 시간에는 고성이 들리고 시끌 벅적해진다.
이제 부터는 사람이 아닌 이웃간의 정이 나누는 대화가 아닌 술의 대화가 시작되는것이다.
당시의 남자 어른들의 스트레스는 날리는 장날이 기다려진 이유이기도 하다.
해질녁이 가까이되면 장터 마당이나 골목 여기 저기에 멱살 잡은 아저씨들의 고함 소리가 들려오고 길에 드러운 사람도 더러 보인다.
술취한 사람을 양쪽에서 부축하는 사람들 마음이 급해진다.
갈길은 멀고 술은 취하고 주정은 더 심해지니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고개 넘어 먼길을 언제 가려는지 모두가 서두르기 시작한다.
이미 장꾼들은 봇짐을 꾸리기 시작한다.
오늘 팔지 못한 물건을 그대로 한곳에 모아 크게 한다발로 묶어 놓으면 힘 좋은 아저씨가 번쩍들어 등에 메고 화물 트럭 짐칸에 까지 가서 실어 놓는다.
장마당의 사람들이 이제 거의 다 빠져 나갔지만 아직도 술집에는 술 취한 사람들의 술 주정과 주모의 바쁜 손놀림이 더욱 빠르다.
결국은 주모의 큰소리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지만 이내 다른 주막집으로 다시 들어간다.
집이 가까운 아저씨는 식구들이 데리러 오지만 고개 넘어 먼곳에서는 아무도 찾아 오지 않는다.
그런 아저씨는 길바닥에 누워 자거나 혼자서 소리 지르며 팔자 걸음으로 홀로 고갯길을 올라 집으로 간다.
어른들은 왜 술을 마시고 거기에 술 주정까지 하는지 의아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모든것이 다 고단한 삶의 스트레스를 풀고 계셨던 것이다.
다시 장날이 되려면 닷새를 기다려야했다.
주막집이 멀거나 양조장이 없는 산골짜기 동네에서는 밀 농사후 누룩을 직접 발효시켜 만든다.
누룩만 있으면 밀주[密酒]가 가능했다.
하지만 술이란 국가에서 관리하는 품목으로 함부로 만들거나 먹으면 안된다
허가없이 만들면 현행범으로 단속되며 벌금이나 구류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먹고 살기 힘든 보릿고개나 1년 내내 보리밥에 고구마나 감자로 연명했지만 어른들은 술이 필요했다.
어린 시절에 명절이나 제사가 돌아오면 모친께서는 밀주를 담그셨다.
단속에 대비해서 조금만 하거나 집안 깊숙한 곳에 감추고 비밀리에 만드셨다.
어느날에는 선친께서 갑자기 뛰어 오시더니 술독을 들고 뒷 싸립문을 지나 산속으로 들어가셨다.
집 밖에 두면 우리 것이 아니라고 우기면 되기에... 하지만 이것도 성질 더러운 사람한테 걸리면 순진한 사람들은 이실직고해버린다.
암튼 밀주가 성공하면 마지막에 술을 거르는데 이때에 술 지게미가 조금 나온다.
어른들은 돼지나 소의 여물에 섞여 먹이려 얼른 갖다 버린다.
이유는 어린 애들이 퍼 먹고 술취할까봐서란다.
산골에서 밀주를 담그면 동네 사람들은 다알고 있다.
심지어는 밀주의 양이 어느 만큼인지도 알고 있다.
그집에 어른들의 환갑이나 기제사가 돌아오는 날에 맞춰 담기 때문에 모두가 알고있는 안비밀이기도 하였다.
양조장을 술도가[ - 都家]라고도 불렀다.
술도가에 들어가면 목소리 큰 아저씨 가끔은 털보 아저씨가 계셨다.
내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막걸리 반되를 사러갔다.
술도가에 들어가면 아저씨들이 무서워 보여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아버지가 술 반되만 사오래요하고 말한다.
그러면 술도가의 아저씨가 주전자를 받아 들면서 야 ~ 임마 남자가 반되가 어딨어 한되면 한되지 하면서 한되를 가득담는다.
나는 놀라서 아저씨 돈이 안돼유~ 반되만 줘유~
그러나 아저씨는 웃으면서 괜찮어 임마 그냥 갖고 가도된다고 하신다.
술도가에는 막걸리를 배달하는 사람도 계신다.
나무로 만든 통인데 어른들은 1말이라고 부른다.
말통이라고 부르는게 편하다.
이 나무통은 견고하게 만들어져 절대로 술이 새지 않는다.
원래 나무는 물에 젖으면 부피가 불어나 서로 빈틈을 메우는 성질로 완벽한 방수를 자랑하게 된다.
말통 위에는 구멍이 한개있다.
구멍의 뚜껑을 열고 기울이면 술이 쏟아져 나온다.
집으로 배달이 도착하면 입구가 조금 넓은 항아리에 쏟아붓는다.
그위에 작은 바가지를 하나 띄워 놓고 술을 퍼담아 마신다.
방금 주막집으로 양조장에서 자전거에 말통을 여러개 싣고 배달이 완료되었다.
배달하는 사람이 돌아가면 주모는 양동이 미리 받아 놓은 물을 막걸리에 쏟아 붓는다.
이른바 물타기 이다.
3말이 4말이되는 신기한 순간이다.
그래서 양조장에서 직접 마시는 술과 주막집에서 마시는 술의 질과 향, 맛이 다른 이유다.
이런 방법은 올바르지 못한 비양심적인 행동이지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모두를 용서하며 묵과[默過]해주었다.
아마도 전국적으로 모든 주막이나 술집에서 이같은 일이 있지 않았나 싶다.
경천 장마당 근처나 주막거리의 술집에서 같은 일이 있었으리라 추측해본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양조장 근무자와 정미소 기술자는 징집대상에서 제외했답니다.
당시에 양조장은 대부분이 막걸리를 만들었을겁니다.
그만큼 대중적이며 국민 대다수가 즐겨 마시는 술이였을겁니다.
더구나 경천 장마당은 계룡면 사무소와 주재소등 공공기관이 있었으며 인구 밀집 지역이이라서 규모도 상당했을것으로 생각합니다.
당시 면장이던 정*각이 지금의 월암리로 이전했지만 말입니다.
경천 국민학교 역시 계룡 국민확교 분교장이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본교가 폐교 위기에 놓여있다네요.
2024년 현재 경천리 마을에는 여러곳의 식당이 성업중입니다.
경천 주막거리가 사실상 사라졌지만 아직도 지명은 주막거리이구요.
본인이 살고있는 괴산군 청천면 지경리 역시 주막거리가 있습니다.
굴티재 초입의 동네이며 삼거리 아니 사거리에 위치해서 그런 이름이 유래된 모양입니다.
주막집의 순 기능은 술도 팔았지만 음식도 함께 팔았으며 하룻밤 묵어가는 여관 같은 숙소의 역할도 하였다.
민초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으며 보부상들의 지친 몸이 쉬어가는 장소 어둡게 이야기하면 범죄 모의나 도박도 성행 했을것으로 추측해본다.
전국의 수많은 주막거리는 이제 전설속으로 사라져가며 지자체가 발행하는 책자의 한 페이지를 차지하기도 하며 역사학도나 학자들의 단골 주제가 되어간다고 본다.
본인도 기억에 의존하지만 주막거리의 원래 모습을 깊이 알지 못하는 상황이라서 한계를 느낀다고 할것이다.
글쟁이도 아니고 문학이나 국문학 또는 역사학을 배우거나 전공하지도 안했으니 모든게 서툴고 획일적이지 않다.
잊혀져가는 어린 시절의 기억의 저편에서 헤엄치듯 모르는것을 아니 잊혀져 가는것을 잡으려 허공에 손을 뻗쳐보는 자신의 몸부림이 안타까지 못해 안쓰럽고 불쌍해보인다.
졸필도 글이라고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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