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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내 인생에 세번의 탈출 [270] 본문
최인태의 세상이야기T 스토리입니다.
방문해 주신 모든님들께 감사드립니다.
1969년 7월의 어느날 새벽에 나는 공장 쪽문을 열고 첫번째 탈출을 했다.
대전시내 한복판 대흥동에 위치한 모 염색공장에 취직을 했다.
월급보다 중요한것은 우리집에서 입하나 더는 일이였다.
더위가 시작되는 어느날에 모친께서 급하게 부르신다.
오늘 점심먹고 대전을 가야한단다.
공장에서 사람을 뽑는다고 연락이 왔단다.
아무런 준비도 없고 마음에도 없는 반강제로 떠나야했다.
버스를 두번 갈아타고 대전 대흥동의 버스 터미날에 도착했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있어 어디간 어딘지 잘알지 못했다.
모친을 따라 어느 친척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아침에 공장으로 갔다.
염색공장인데 굴뚝이 하늘높이 솟아 있으며 함석 지붕을 이어붙인 오랜 건물과 한편에는 콘크리트 신축 건물이 작게 있었다.
직원은 남녀 포함해서 약 20명 정도 되는것 같았다.
공장 시스템은 저 안쪽에서 원단을 대형통에 넣은후 물감을 풀고 몇번을 꺼냈다 다시 넣었다를 반복한다.
다음 단계는 이 원단을 재봉으로 이어붙이며 둥근 통을 감아 돌면서 수증기를 증발시키며 반건조한다.
마지막에는 내가 지키는 마무리 기계가 길다랗게 붙어 있다.
나는 이곳에서 지켜 서있다가 부자 소리가 울리면 잽싸게 잡아당겨 봉제선을 끊어 내야한다.
만약에 놓치면 기계를 잠깐 세워야하는데 이게 골치 아프다.
통안에는 엄청난 열기가 가득해서 위험하단다.
아직 숙련되지 않아 자꾸 실수를 연발하기도 했으며 더워서 이마의 땀방울이 원단에 떨어지면 불량품이 된다.
공장장인지 담당자인지 드럽게 지랄한다.
누구는 실수하고 싶어 하나...
아침에 시작하면 우리만 야간 작업으로 이어진다.
공정상 마지막 단계라서 어쩔수가 없다나 뭐라나...
한달간을 이를 악물며 참았다.
적성에 맞지도 않고 하루 종일 갇혀있어 숨이 막혀온다.
당장에 도망을 가고 싶어도 수중에 돈이 한푼도 없다.
월급날 까지만 참아보자고 이를 악물며 참았다.
드디어 월급날이 되었다.
저녁 시간에 현금으로 봉투를 나누어준다.
나는 초봉이지만 두둑했다.
야간 작업 수당이 포함되었단다.
당시 약 2,200원이 들어있었다.
저녁밥을 먹고 흥분 되어 잠이 오질 않았다.
가방도 없이 작은 보따리 한개를 미리 싸놓고 누웠다.
이제 저 쪽문을 열고 도망가면 해방이다.,
새벽 4시 아직도 밖은 어두었지만 늦으면 안될것 같아 살금살금 걸어서 문을 열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골목을 몇번 돌아 넓은 공터가 나와서 풀밭에 앉아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공주에 가야하는데 어디가서 버스를 타야하나 그런데 저멀리 대전역이 보이는게 아닌가!
일단 역으로 달려갔으나 공주에는 기차가 다니질 않아서 돌아서 나왔다.
아침밥을 안먹었지만 배고픔도 잊었다.
길을 물어 다시 원점인 대흥동 터미날에서 공주행 버스를 탔다.
다시 공주에서 논산가는 버스를 타고 금띠에서 내려 걸어서 집에 도착했다.
부모님은 반기면서도 실망하시는것 같았다.
그래도 월급을 내어주니 웃으신다..
지게를 지고 풀을 베러 들판에 나오니 이게 사람사는 세상이다.
하늘이 안보이는 공장은 내가 있을곳이 못되었다.
1970년 어느 봄날 새벽에 나는 집 뒷문을 열고 두번째 탈출을 감행했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남의 자전거를 몰래 훔쳐서 잠깐씩 배운것이 전부 였다.
그러니 간신히 중심 잡고 타는게 전부 였다.
그런데 어느날에 서울 계신 숙부가 나를 데리고 이태원의 모처에 도착했다.
저녁 무렵에 어느 가정집 같은 곳인데 아저씨 들이 여러명이 모여 있었다.
마당에는 자전거 그것도 짐을 싣는 이른바 짐발이 자전거인데 완전 대형이다.
여기서 저런 자전거를 타고 물건을 배달하는일을 하는곳이란다.
숙부님은 나에게 말한디 묻지도 않고 그곳 사장에게 우리 조카인데 자전거를 아주 잘탄다고 말을 하고 있었다.
아마도 숙부님이 이곳에서 오랫동안 일을 하신 모양이다.
숙부님이 물러 가고 밤 늦은 시간에 자전거를 몰래 타보았는데 아뿔싸 자전거에 올라 타지도 못했다.
이유는 짐을 싣는 전용 자전거는 엉덩이가 닿는 안장의 높이가 엄청 높게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몇번을 연습해도 빈 자전거를 올라 타지도 못하는데 큰일이다.
나도 망신이지만 숙부님도 망신일것이기 때문이다.
밤새 뒤척인다.
잠이 올리가 없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신림동까지 갈 버스비는 되었다.
신림동에는 큰누이가 살고 있어서 거기 까지만 가면 집에가는 버스비는 얻을것 같았다.
날이 밝기전에 도망 가야 깔끔할 것 같았다.
그래야 그곳 사장도 한마디 욕만 하면 될것이고 그곳 아저씨들도 한번 웃고.말것이다.
이른 새벽에 화장실 가고 세수하는 사이에 문을 나왔다.
지난번 처럼 일단 멀리 벗어나야 했다.
어디로 가야하나?
중얼 중얼 중얼.....
한참을 걸어가니 큰 길이 보였다.
가겟집 옆에는 공중 전화도 보였지만 전화거는 방법을 몰라 패스했다.
지나가는 버스를 바라보니 신림동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그런데 반대 방향이면 큰일이다,
버스 요금이 모자라서...
다행이 신림동의 어느 정류장에서 내렸다.
걷고 또 걸어서 오후에 매형이 운영하는 시계점에 도착했다.
누이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내가 할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1971년 어느 가을날에 나는 공장의 담을 뛰어 넘어 세번째 탈출을 감행했다.
전날 오후 무렵에 나는 사돈[형수의 남동생]과 함께 뚝섬의 어느 공장에 도착했다.
면접이고 인사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없이 곧장 공장안으로 들어 갔다.
넓은 공장에는 방직기계가 정신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메리야스 만드는 원단을 직조하는 기계란다.
여기서 내가 하는일은 수많은 실타래가 돌아 가는데 실이 끊어지면 불량이 나니까 육안으로 지켜보면 된다고 한다.
그런데 한두대도 아니고 수백대는 될것같은데 거기에 기계 한대당 실타래는 수십개씩 달려 돌아 가고 있었다.
사람이 몇명인지 알수도 없고 누가 공장장인지 관리자인지 알려주지도 않는다.
다만 내 또래 비슷한 아이가 내 옆에서 뭘 알려주려한다.
하지만 나이를 물어보니 두살 아래인데 지가 선배란다.
12시가 되니 라면 한그릇먹고 하란다.
아직까지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지켜보고만 돌아다니면 되었다
새벽 02시가 되니 몇놈이 구석에서 자빠져 자고 있다.
이제는 남은 사람은 두명 정도 되나 그런데 저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가보니 실타래가 돌아가지 않는다.
혼자 어떻게 할수없어 동료를 부르니 지랄부터 해댄다.'
일찍 발견하지 못해서 불량이 너무 많이 발생해서 큰일이란다.
일단 기계는 멈추고 수습을 한다.
05시가 되니 도저히 참을수가 없다.
눈꺼풀이 내려 앉기 시작한다.
찬물에 세수도 해보고 찬바람도 쐬어보고 귀에서는 멍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
교대 시간이 가까워지나 보다 출근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자식들이 한결같다.
자난밤의 불량품 이야기만 하며 가만히 들어보니 모두가 내탓으로 돌리고 있다.
새로 들어온 신입에게 덥혀 씌우고 자기들은 빠져 나가려는 수작이다.
화장실에서 순간 착잡함이 밀려온다.
이런 쓰레기 같은 공장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얻겠는가?
첫째 사람 대접을 해주지 않는다.
가방을 걸어 놓은 숙소에 들어가보니 이곳은 돼지우리 같았다.
모두가 아침밥 먹으러 가고 아무도 없다.
순간 갈등이 생기지만 망설일 시간도 없다.
정문으로 나가면 뭐라 할것이고 옆의 담장으로 넘어 갈것 같았다.
가방을 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넘었다.
최대한 멀리 달아나자.
골목길에는 뚝도 극장 영화 포스터가 찬란하게 붙어있었다.
그것도 동시 상영으로....
이래서 3번의 탈출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이였다.
나이 들어 생각해봐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 사전에 후회는 없다라고 말하고 싶다,
당시의 모든 상황을 생각해보면 본인도 가슴이 아프다.
첫번째는 이종사촌 형이 근무하는 공장이라서 모친께서 선뜻 승락을 하셨나 보다.
한살 더 많은 형이지만 사실은 1도 도움이 되지못했다.
그 형의 고종 사촌형이 공장에 높은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근무 첫날 자세한 설명도 없었으며 누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속에 내성적인 시골 촌놈이 견뎌내기에는 역부족이였다.
잠을 자는 숙소는 공장 한켠에 마련되었는데 방 한칸에 여러명이 어떻게 잠을 자고 생활했는지 기억도 없다.
식사는 공장 마당 옆에 비가림 해놓고 할머니 한분이 고생하시는 모습이 선하다.
두번째 역시 내 의사는 완전 무시되고 자전거 탈줄도 모르는 사람에게 짐을 가득 싣고 배달이라니 기가 막힐이였다.
새벽에 그집을 나오지 않았다면 개망신을 당했을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오는것이 그나마 현명한 방법이였을 것이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세번째 역시 변명 같지만 내 인생이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았다.
개목줄 걸고 살아 가는 그런 인생은 죽기 보다 싫었다.
당시에는 공장에서는 인권이라는 말은 없었다.
소위 입사 서열만이 존재하던 시절이였으니까?
공돌이로 늙기는 싫었다.
최선이 안되면 차선책으로 살아 가야 한다.
길이 막히면 돌아서거나 다른 길을 찾는것이 현명한 선택일것이다.
내가 할수 있는 일이 있고 내가 할수 없는 일이 있다.
포기할줄도 알아야한다.
외고집 으로 한 우물만을 고집할수는 없으니까?
내가 행동에 후회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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