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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경천 들녘의 워낭 소리(22) [241] 본문
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T스토리입니다.
방문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봄이 오는 들녘에 울리는 워낭소리가 그리워집니다.
우리는 워낭 이라는 낱말이 생소합니다.
물론 순수한 우리말이지만요.
아버지는 워낭이라 하지 않고 소 방울 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송아지를 우시장에서 사오면 몇 달후 부터 소위 훈련을 시키게됩니다.
조금 더 자라면 소의 코를 뚫어 나무 고리를 걸고 그걸 잡아 당겨 소를 통제하게됩니다.
코뚜레인데 우리 동네의 소들은 노간주 나무를 이용하여 만들어 마취 없이 강제로코 살에 구멍을 뚫고 그 안으로 둥그럽게 만든 코뚜레를 집어 넣은후 밧줄을 걸어 소 뿔위로 옭아 매는 방식입니다.
생후 약 8개월이 지나면 소의 코를 뚫어 코뚜레를 옭아맵니다.
힘이 좋은 소를 쉽게 통제하는 방법입니다.
우선 산에가서 노간주 나무를 채취합니다.
가지를 제거하고 껍질을 벗긴후 불에 구우면 됩니다.
생나무라서 쉽게 구부러지며 불에 구우면 그 둥그런 형태가 그대로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코뚜레가 준비되면 소에게 막걸리를 조금 먹여줍니다.
이날은 동네 어른들도 오십니다.
막걸리도 나누어 드시고 소에게 큰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위험하거든요.
어른들이 힘을 모아 함께 하시려구요.
아이들은 못보게 하려고 멀리 가라고 합니다.
소의 코에 구멍을 뚫는 도구는 제 기억에는 작은 나무를 송곳 처럼 만듭니다.
끝이 아주 뾰족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가 움직일수 없도록 최대한 결박후 불에 살짝 구운 다음 그대로 가운데를 통과합니다.
당연히 피가 흐르지요.
그 구멍으로 미리 만들어 놓은 코뚜레 나무를 관통 시킨후 맨윗 부분을 잡아 매줍니다.
이때 지혈을 위해 소의 콧 구멍 주변을 된장을 발라줍니다.
약 25일에서 한달정도 기다리면 됩니다.
당시에는 자동차 폐타이어가 없어 산에가서 큰 통나무를 잘라옵니다.
아이들 썰매 형태로 크게 만든후 소의 등에 멍에를 걸고 매어준 후 고삐를 잡고 소를 몰아 들판이나 길에서 강제로 끌고 다니면 훈련이 시작됩니다.
며칠후면 통나무의 아랫면이 절반 정도 닳게됩니다.
소위 소의 길들이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얼마후 밭에서 실전에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앞에서 소의 코뚜레나 고삐줄을 잡고 같이 걸어 갑니다.
소가 혼자 다닐수 있을때 까지 하는데 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나며 소 주인의 방식에서도 차이가 났을겁니다.
1960년대 농기계는 없었구요.
100% 소와 사람의 힘으로만 농사 지었습니다.
경작하는 논이 많거나 일하는 아저씨 즉 머슴이 있는 집은 당연 소와 쟁기가 있었지요.
하지만 소를 키우지 않거나 그럴만큼의 땅이 없으면 품앗이를 하였지요.
논밭을 하루 종일 갈아 주면 사람이 대신 일을 해주는 그런 방식으로요.
몇 몇집은 돈으로 주기도 하였을겁니다.
경천 들판에는 두 종류의 논이 있었습니다.
용머리 앞뜰과 들말 부근의 논들은 일년 내내 물이 빠지지않는 그런 논이였습니다.
가끔은 소와 쟁기 사람도 빠지는 수렁논도 있었구요.
당연 일년에 한번 쌀농사 뿐인 수렁논이였지요.
마른 논에는 작년 가을에 밀과 보리 씨앗을 파종해서 2모작을 하였구요.
이른봄에 작물이 자라지 않는 수렁논 부터 쟁기질이 시작됩니다.
요즘은 트랙터 같은 농기계를 이용하여 힘들이지 않고 넓은 면적을 쉽게 경작할수있지만요.
논이 길이나 넓이에 따라 소와 쟁기는 수십번 아니 수백 수천번을 왕복해야 합니다.
모내기가 임박해지면 써레를 이용하여 논 바닥의 흙을 평평하게 고루게 펴게됩니다.
써레질 역시 수백번을 왕복해야 했습니다.
논의 물 높이에 따라 빙빙 돌기도 하며 다른 한곳으로만 집중해서 하기도 하였구요.
논의 밀과 보리가 익어 추수가 끝나면 곧바로 물을 넣고 쟁기질이 시작됩니다.
새벽부터 이어지는 쟁기질은 어두운 밤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오십니다.
이때 소도 사람도 지쳐 힘들게 돌아오지요.
어린 우리는 아버지를 찾아 들로 마중을 갑니다.
어슴프레 저 멀리서 귀에 익은 소방울소리[워낭소리]가 들립니다.
우리는 달려가서 아버지 손에서 소의 고삐를 받아 소를 앞세워 집으로 돌아옵니다.
하루 종일 힘들게 물속에서 흙속에서 아마도 수십km를 걸었을겁니다.
아버지도 소도 다리에 힘이 풀리는지 너무 힘들어 보이네요.
집에 돌아 오면 외양간 구유통에는 소 여물이 한가득 들어 있습니다.
소가 여물을 먹는 모습 조차도 힘들어 보이네요.
저녁 진지에 막걸리 한사발을 곁으신 아버지는 이내 골아 떨어지십니다.
다음날 새벽 일어나 보면 외양간의 소도 아버지도 안보이네요.
아침 일찍 들에 나가신겁니다.
논두렁 길을 걸어 학교로 갑니다.
논둑길 중간에서 들려오는 이랴 어저저저~~~ 아버지의 힘찬 소몰이 소리가 들려옵니다.
학교에서 일찍 돌아 오면 소 여물과 아버지의 새참을 지게에 지고 들녘으로 달려갑니다.
소의 얼굴을 보는 순간 미안함이 몰려옵니다.
소의 입에는 부리망이라는 짚으로 만든 그물 모양의 얼굴 덮개가 씌여있습니다.
논두렁의 풀 한포기 못 먹게 할려고 걸어 놓았는데 그 사이로 소의 침이 줄줄이 흘러 내리고 있었습니다.
사람도 지치고 힘들면 숨소리도 거칠어지지만 입에서는 침을 질질 흘리는 것 처럼요.
나는 지게에서 소 여물을 내려 소앞에 놓은 후 부리망을 풀어 줍니다.
많이 먹어라고 하지만 양이 적어 먹을게 별로 없답니다.
우리 논도 아닌데 아버지는 하루 종일 소와 함께 논밭에 계십니다.
모내기가 시작되면 아버지의 논갈이도 절반을 하시게됩니다.
나머지 절반은 밀과 보리를 베어낸 늦은 자리의 논만 남은것이거든요.
밀 보리를 금방 베어낸 논밭은 땅에 붙은 줄기 부분이 남아 있어서 이것이 가시 처럼 발바닥이나 발등을 아프게 합니다.
당시에는 장화도 귀해서 거의 맨발로 하셨지요.
경천 들녘의 논밭은 거의 자갈 논밭의 형태입니다.
모내기를 오래 하다보면 오른손 손톱과 손가락 맨 끝 부분의 피부가 닳아서 아주 얇게 됩니다.
결국에는 피가 흐르게 되고 상처가 생기지요.
그래도 모내기는 계속됩니다.
모든 농사는 때가 있기 때문에 그 시기를 놓치면 안되거든요.
이때는 뒷산에 오르면 밤나무에는 작년에 만들어 매달린 벌레집이 달려있습니다.
제 기억에는 두가지 종류로 생각이 나는데 짙은 파란색으로 청개구집이라고도 불렀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물망 형태로 얼기 설기 만들어진 그런 모양이였지요.
이것을 채취해서 입구부분을 가위로 손가락 크게에 맞춰 잘라낸후 손가락에 끼워 사용합니다.
사실 이것도 하루 이틀뿐이지만요.
울 아버지의 쟁기질은 계속됩니다.
비가 내리면 그만큼 힘들어지지요.
비가 많이 내려도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그대로 하십니다.
우비도 없어 짚으로 만든 거적같은 비옷을 입고 그대로 하시네요.
소는 내리는 비를 그대로 모두 맞고 하구요.
다음날 아침 비가 개이면 건넛편 동산에 뭉게 구름이 만들어지며 숲에서는 뻐꾸기의 심술궂은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넓은 들에 우리 아버지 혼자 다하시는것은 아닙니다.
여기 저기서 소몰이 소리가 들려옵니다.
논두렁에서 떨어지는 물소리와 함께 들려 오는데 풍년가를 부르는듯 들려오기도 하구요.
어떤때에는 너무 힘드신 목소리로 구슬픈 아리랑 가락으로 들려오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소들도 힘이 있어 부지런히 잘 걸어 갑니다.
며칠 뒤에는 소들도 힘이 부치니 느릿 느릿 걷게 되고 방향 회전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집니다.
그럴때마다 아버지의 고함 소리는 더욱 크게만 들려오네요.
이랴~ 이랴~ 어저저저~ 져져져져~
소도 사람도 함께 지쳐갑니다.
이제 여름 햇살이 본격적으로 뜨거워 지면 논 밭 갈이가 모두 끝나게 됩니다.
누렁이는 이제 외양간에서 쉬며 낮에는 들판의 밭둑이나 냇가의 둑방에 매어져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렇지만 누구네 누렁이는 가끔 달구지를 끌어야 합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또 일을하게 됩니다.
우리 아버지는 소 달구지도 없어 다행이구요.
방앗간의 황소는 논밭을 갈지는 않지만 일년 내내 달구지를 끌어야 하구요.
벼를 가득 싣고 언덕 넘어 동네를 다녀오려면 사람도 황소도 너무 힘듭니다.
그래도 방앗간의 황소는 먹을게 많습니다.
방앗간에서 나오는 부산물중에 등겨나 밀겨가 나오는데 영양가는 모르겠지만 어찌됐든 사람이 먹는 곡식의 일부라서 소에게는 영양식이라합니다.
소 여물통을 보면 이것을 가득 넣어주더군요.
그런데 우리집 누렁이는 그렇지 못합니다.
등겨나 밀겨를 사람이 먹기도 하거든요.
우리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지게를 지고 소먹이용 풀[꼴] 깔을 베러나갑니다.
우리 고향에서는 꼴이라 하지 않고 깔이라고 불렀습니다.
친구야 우리 깔베러 가자......
당시에는 풀도 귀했습니다.
아마 농약방에서 제초제를 판매했다면 한개도 팔지 못했을겁니다.
논밭의 주인들이 풀이 자라기도 전에 잘라갑니다.
남의 논두렁 풀을 베어 주면 고마운 일인데 당시에는 야단 맞거나 그 풀을 주인에게 빼앗겼습니다.
재수 옴팡지게 없는 날이였지요.
그래서 할수없이 산으로 올라갑니다.
산에 풀들이 많아서 우리를 기다려 주지는 않지만요.
그래도 노출되지 않고 숨어서 조금이라도 깔을 베어 올수가 있거든요.
산에 자라는 풀들은 거의가 억센풀들이라서 소가 별로 좋아 하지는 않더군요.
더구나 들말이나 상보안 저쪽에서 조금 베어서 돌아오는데 용머리에 사는 선배가 기다리고 있다가 뺏어갑니다.[죽일넘]
어디서 베었던 무조건 지네 논두렁이라합니다.
그 선배넘 덕에 제가 담배를 평생 피우지 않았습니다만...
아주 웬수 같았습니다.[당시에는 말입니다.]
자기도 풀은 필요하고 풀도 없고 일하기도 싫고 해서 나이많다고 선배라고 힘세다고 완력으로 그런짓을 했지요.
이넘이 물고기[붕어 미꾸라지등]를 잡아도 지내거라고 우기면서 빼았아 같거든요.
여름방학이 되면 우리는 소의 고삐를 잡고 소를 끌고 풀이 많은 곳을 찾아 이동하면서 풀을 먹게 해줍니다.
이것을 우리는 소뜯기러 간다고 불렀습니다.
표현해보면은 소에게 풀 뜯어먹이러 간다는 뜻일겁니다.
마을 마다 아이들이 각자 자기집 소를 끌고 냇가의 뚝방으로 모여듭니다.
소를 잠깐 주변의 나무에 묶어 두고 우리는 발가 벗고 멱을 감지요.
낮이라도 우리에게는 빤스가 별로라서 그대로 홀딱 벗고 맨몸으로 합니다.
팬티가 젖으면 말려야하는데 귀찮기도 하고 시간도 없고 해서요.
긴긴 해가 노성산 산마루에 걸리면 이제 각자 자기집으로 소를 몰고 돌아갑니다.
저녁밥을 먹고 마당에 모여 앉으면 모기쫓는 모닥불을 피우는데 아버지은 외양간 앞에도 피웁니다,
소에게 덤비는 모기를 쫓아내기 위해서요.
밀짚으로 만든 멍석에 누워 있으면 시원한 여름밤의 바람과 외양간의 워낭소리에 잠이들지요.
소들은 되새김으로 잠들지 않는한 입을 움직여야해서 목 아래 달려있는 워낭[방울]이 소리를 내게됩니다.
일을 하지 않고 제 자리에서 들려오는 워낭소리는 그대로 자장가입니다.
눈이 녹고 얼음이 풀리면서 작은 개울에 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계룡 저수지는 완공되어 수로에 물이 흘렀지만 경천 저수지는 공사중이어서 물이 없었구요.
도랑에 흐르는 물을 논에 가두기 시작합니다.
2월말부터 3월초에 개구리들이 잠깐 외출해서 알을 낳아놓습니다.
얼마후에 알이 부화되어 올챙이가 나옵니다.
모내기전에 논이 물이 가득 담기면 밤에는 개구리들의 합창이 울려퍼집니다.
정말 시끄럽습니다.
소음으로 들으면 사람이 괴로울 정도지만 자연의 노랫소리로 듣는다면 아주 훌륭한 오케스트라 연주곡이 되겠습니다.
아버지의 쟁기가 논에 들어오면 개구리들이 당황해서 이리 저리 뛰어다니네요.
그 당시에는 제초제 같은 농약이 없어서 개구리와 민물고기등이 아주 많았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들을수도 볼수도 없는 그런 소리가 되겠습니다.
소 방울 소리 아니 워낭 소리입니다.
더 아쉬운것은 방울 소리보다 소를 모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이랴 이랴 어저저저저....
오늘밤 꿈속에서 만나보렵니다.
워낭 소리와 함께 그 시절 아버지의 목소리를 말입니다.
이른봄 경천 장날입니다[2,7일날]
어린나이지만 그래도 남자라고 우시장 우리말로 쇠전거리부터 찾아갑니다.
우시장 한켠에는 어미곁을 떠나야하는 송아지도 보이구요.
겨우내 쉬면서 여물을 많이 먹은 누렁이도 많이 보입니다.
이제 본격적인 농사철이 다가오니 누렁이 황소의 가격도 오를겁니다.
쇠전 거리 중개하시는 어른들이 두드리는 소의 엉덩이 때리는 소리가 아주 힘차게 들려옵니다.
처음에는 소의 입을 벌리고 나이를 가늠해보구요.
다음에는 목 그리고 전체적인 윤곽을 엉덩이 부분의 근육을 만져본 다음에 소의 가격이나 등급의 판정을 내리는 소리입니다[1971년 봄의 누렁이 가격은 당시 최고가 12만원으로 기억나네요.]
장에 나온 소들의 표정은 항상 여유롭고 평화로우며 목에 달린 방울[워낭]의 소리도 느릿하게 들립니다.
크고 선한 눈동자를 가진 덩치큰 동물이여...
점심 무렵이면 우시장은 파장이 됩니다.
그 옆에는 돼지와 염소 닭 그리고 개와 고양이 토끼도 보이구요.
봄철에는 아주 귀여운 병아리도 보입니다.
제천의 청풍 문화재 단지안에 관람하다보면 소의 전설이 설명 되어있습니다.
태초에 옥황상제와 인간 세상과의 전령으로 소가 선발되었다.
인간에게 사흘에 한번 식사하라는 명을 하루에 세번 먹으라고 잘못 전했다.
사람은 배를 채우기 위해 9배로 일해야 했다.
이는 인간에게 엄청난 고통의 시작이 되었다.
사람에게 고통을 준만큼 사람을 위해 일하고 죽은 다음에도 고기와 가죽
까지도 헌납하라는 명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인해 소는 논밭을 갈고 달구지를 끌며 연자 방아를 돌려야 했다.
전설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불쌍하다.
하지만 지금은 소에게 일은 안시키지만 배 부르게 잔뜩 먹여 놓고 잡아 먹는다.
그것도 고가의 가격으로 판매 되고 있다.
예전의 소들은 힘들게 일했지만 평균 수명이상으로 오래 살았다.
현재의 소들은 하루도 더 살리지 않고 정확한 날짜에 죽는다.
에고고고... 불쌍하다.
이제 듣고 싶어도 저 멀리 희미한 기억에 의존해 본다.
아버지의 친근한 목소리와 함께 말이다.
소 방울 소리 아니 워낭소리는 이 땅에서 더 이상 울리지 않는다.
소들의 노동력을 생각하면 차라리 잘된 일이다라고 생각되어 진다.
왜냐 지금도 그 소리가 들린다면 어딘가에서 소들이 힘들게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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