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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경천역 이야기(20) [220] 본문
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T스토리입니다.
방문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경천 이야기 시리즈 이번에는 20편으로 경천역에 대하여 적어봅니다.
경천역 이렇게 말하면 기찻길도 없는데 무슨 역이냐고 물으실 겁니다.
철도가 꼭 있어야 하는 역[驛]이 아니라 역참[驛站]을 말하는 것이랍니다.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가 그만큼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계룡산이 내어 주는 모든 것에 풍족하지도 모자람도 없는 경천땅에 인심이지요.
계룡면민이나 경천리 주민 그리고 경천이 고향인 출향인들 모두 자부심과 자긍심으로 고향 경천을 사랑합시다.
경천역 아니 경천 역참의 터는 현재로서는 정확하게 표시되지 않네요.
상 이문[上里門 [ 과 하 이문[下里門]의 위치는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1960년대 중반까지 상 이문은 건재했습니다.
아랫이문은 전쟁 중에 소실로 나오고요, 윗이문은 실화[失火]또는 방화[放火]로 밝혀지고 있네요.
지금도 경천 주민들은 윗이문 거리 아랫이문 거리라고 부른답니다.
이[里門] 문은~ 역참이 자리한 마을의 입구 위아래에 지은 건물로 아주 단순합니다.
전국에는 수많은 이문이 설치되었으며 도둑으로부터 마을 지키는 문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기둥이 네 개이며 실제 문은 없었다.
지붕은 기와를 얹었으며 요즘의 원두막 정자 같은 건물이었다.
전라남도 강진에서 한양까지의 먼 거리를 이어주는 길목으로 계룡면 지역은 경천 3구 등정골부터 시작이다.
논산시 상월면 지경리를 경계로 시작해서 공주시 금강을 만나면서 계룡면을 통과하게된다.
우측으로 등정골을 버리고 올라가면 용머리 마을 느티나무와 정자가 서있다.
여기서 용두천의 다리를 건너면 아랫 이문 터를 지나게 되고 곧이어 경천 장터가 나타난다.
장터 초입의 연산 가는 길은 우측이며 장터 중간에 우물이 있었다 [현재는 폐기된 상태].
장터를 지나 중학교 정문 앞을 만나고 경천 교회 종탑을 바라보며 구비안으로 접어들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어사길로 삼신당 고개를 지나 삽작골 그리고 금대리[황새울]를 통과하면 부치당 [부추당] 고개를 넘는다.
원터마을이 반겨주고 계룡 저수지 둑이 보이며 월암리로 들어서게 된다.
월암리는 문암이라는 지명도 있었다.
어른들은 문암의 충청도식 발음으로 무내미라고 부르며 월암리의 작은 장터에 장이서면 무내미 장 보러 간다고 하셨다.
한양으로 향하는 길은 지금도 호남선 [고속철도]이 지나는 철교 아래로 늘띠 [널티] 고개를 넘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호남에서 한양 가는 길목은 예나 지금이나 계룡면을 지나가야 한다.
계룡면 하대리에 원터 [院] 마을이 있다.
실제로 삼남길에 원[院]이 있었는지 다른 연유로 원터마을이 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삼남대로에서 마주하는 원터 마을은 왠지 그냥 넘어가기에는 많은 아쉬움이 따른다.
원터마을은 전국적으로 수백 곳이 넘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땅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이동의 필요성에 따라 길을 만들고 그 길로 이동해서 왕래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권력의 중심이 한양이다 보니 모든 길이 한양으로 연결되고 이어진다.
당시에는 도보로 즉 걸어서 이동하다 보니 시간도 많이 걸리고 밤에는 잠을 자야 했으며 허기를 달랠 장소도 필요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원[院]이다 지금은 그 흔적이나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더라도 원이 있던 터를 중요시하며 마을 이름도 원터라는 지명이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문경새재에도 두 곳의 원터가 자리하고 있다.
주흘관과 조곡관 사이의 원터는 건물만 없이 원형 그대로 유지되는 모습이다.
조령관 가까이 올라가면 동화원이라고 지명까지 있다.
경천역이 대단하냐 묻겠지만 우리는 역사를 잊으면 안 됩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독립운동가 [신채호]가 말했던 링컨이 말했던 중요한 것은 인물이 아니라 말의 핵심인 것이다.
역사는 당대에 기록되는 것은 과장이 들어가지만 후대에서 거론되거나 새롭게 기록되어야 한다.
경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으며 학교에서 조차도 가르치지 않았다.
내가 고향을 떠날 무렵이 경천장터를 비롯해서 경천리 인구가 최고의 황금기가 아니었나 회고해 본다.
경천역이 존재했었다는 자부심을 키웠을 텐데 나만 모르고 살았는지 그렇다면 다행이다.
만약에 전부가 모르고 성장했다면 좋은 일은 아니겠지만 일부는 어슴프레 알 수도 있었을 것으로 예측해 보는데 이유는 경천역 사음 박준학 청덕 시혜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천 역참의 건물터 위치의 확인은 유물 발굴하기 전에는 불가능할 것 같다.
삼남대로 순례객들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현재의 비석 위치는 잘못되어 하루빨리 삼남길로 이전 설치 되길 기대해 본다.
경천역 개요. [敬天驛 槪要]
위치는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에 설치되었던 조선시대의 교통 통신 기관이다.
공주에서 논산으로 가는 길목에 설치된 역[驛]으로서 국가의 공문서 전달 그리고 변경[邊境]의 군사정보 전달과 사신[使臣]의 영송[迎送]의 접대 등을 위하여 마련된 기관이다.
공주의 광정역, 유구역, 단평역, 연산현의 평천역과 함께 일신도 [日新道]는 일신역을 중심으로 한 역참[驛站]에 속하였다가 세조 때 성환도 [成歡道] 직산의 성환역을 중심으로 하는 역참에 병합되었다.
여지도서[與地圖書]에 따르면 기마 7 필, 복마 8 필, 노 [奴]37명, 비[婢] 18명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삼남을 연결하는 큰길이며 교통 요지였으나 갑오개혁 때 폐지되어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에 따르면 공주에서 효포를 지나 무너미[늘티] 고개를 넘으면 역[驛]이 있고 역을 지나면 노성[논산시]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경천역은 고려전기 전국의 525개 역을 22개의 역도[驛道]로 편성하는 과정에서 전공주도[全公州道]에 소속되었다.
조선시대 세조연간에 역제를 41역도 543 속역 체제로 개편할 때 성환도를 구성하는 역이 되었다.
1061년[고려문종 15]에서 1136년[고려인종 14] 사이에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 세조 실록에 따르면 세조 6년 2월 5일 기록에 의하면 성환도 , 일신도, 증약도, 율봉도를 합하여 성환도라 칭하고 증약도찰방으로 책임을 부여했다고 한다.
성종실록에는 1475년[성종 6년] 형조에 명하여 경천역에 정역[程驛]되었던 김관을 초지량으로 옮겨 충군 하게 하고 박흥부는 고향으로 보내라고 기록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역이 6곳이라 기록되었다, [일신, 광정, 경천, 이인, 단평, 유구]
경천역참의 위치나 터는 확인 할 수가 없다.
추측해 보면 장터 부근이거나 소방서 인근 아니면 경천중학교 교정으로 짐작해 본다.
이유는 삼남길의 고려나 조선시대의 생활상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경천리 지역은 예나 지금이나 넓은 개활지[開豁地] 임은 확실하다 당시에도 넓은 땅에 세우는 것이 유지, 관리 목적에 부합되었기 때문이다.
이 땅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할 때는 우선은 자연적인 지리 형태를 생각했을 것이다.
좋은 자리 놔두고 굳이 위험한 곳을 찾아 집터를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이 북쪽이 산이나 언덕으로 막고 있으면 길지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겨울철 추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햇볕의 중요성 또한 배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연유로 보면 경천 지역의 남북으로 이어진 길을 생각해 본다.
역사의 기록으로 확인되었으니 유물 발굴이나 역참의 터를 찾아낸 들 별수 없을 것으로 나 홀로 판단해 본다.
현재의 비석은 몇 번을 이전 설치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중학교 교문 앞 길 건너편에 여러 개의 비석이 기억나는데 갯수는 잘 모르겠습니다.
고향 친구에게 물어보니 3개만 그대로 기억하네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살펴보면 장터 마당 한편에도 비석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역사가 오래된 마을은 저런 형태의 비석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초기 건립 당시에는 편의상 여기저기에 세웠고요.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한 곳으로 모았을 겁니다.
일례로 보면 문경새재 입구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비석이 서있고요.
공주 공산성 입구에도 수많은 비석들이 사연을 간직하고 서있습니다.
가장 많은 비석은 시혜비, 다음으로는 불망비와 공덕비등일 것이고요.
비석의 이름에 나오는 분들의 고마움을 후대에서 기억하고 간직하자는 의미입니다.
가끔은 가슴 아픈 비석도 보이는데 이분이 월북을 했거나 친일파로 분류되어 어느 철부지께서 이름 글자만 훼손하는 것입니다.
역사란 좋은 것만 기억하고 간직할 수 없는 것이랍니다.
슬프거나 나쁜 것도 역사이고 우리가 물려받고 기억하고 후대에 전해야 합니다.
근현대의 건물이나 서책을 친일이라 해서 모두 없애버리면 나중에 후대에 어떤 식으로 가르칠 수가 있을까요?
다리건너에 불편하게 서있는 비석 3기 중에 경천역에 관한 것은 경천역 사음 박준학 청덕 시혜비뿐이고요.
전승지 김교준 불망비는 경천출신 인사로 구한말에 충청남도 관찰부 총순 강원도 재판소 주사와 황해도 관찰사 주사 그리고 종삼품 중추원외관을 역임.
1907년 동양 척식주식회사 설립위원이었으며 일제 초기에는 경천을 떠나 경성에서 거주하였습니다.
충청도 관찰사 심의신 청백선정비가 있습니다.
이분은 1836년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현종실록, 비변사등록, 일성록에는 심의신은 부임 후 도내의 진휼[賑恤]및 대흥군봉서 사건해결과 관리등의 포상과 치죄등의 치적이 기록되어 있다.
당대 유명한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이분의 업적은 충청도 관내 여러 곳에 수많은 비석이 있다.
마을마다 비석의 공적이 다르게 적혀있다.
경천의 비문에는 선정비이지만 다른 곳에는 영세불망비라 쓰여 있다.
경천역 사음 박준학 청덕시혜비는 3기 중에 가운데 서있다.
이분은 사음[舍音]으로 사음이란 마름으로 불리는 지주[地主]의 대리인 역할이다.
풀어보면 박준학이라는 분은 경천 지역의 지주의 대리인이었다.
마름이 주로 하는 일은 소작농민으로 소작료를 징수 보관했다가 상납하는 일이 주 임무였다.
사음 즉 마름이라는 이 사람들은 중간 수탈을 행하며 농민착취와 온갖 구실을 만들어 강제노역까지 부과하기도 했다.
해방 이후 농지개혁법이 시행되면서 소멸되었다.
박준학은 이런 자리에 있으면서도 청덕시혜비를 받았으니 존경받을 인물이었다.
경천에 고려시대부터 역이 설치되어 운영된 것을 보면 자랑스러운 우리의 역사이다.
경천 역참의 자세한 이야기는 알 수 없으나 대부분이 짐작으로 유추해 본다.
본인은 역사학자도 아니며 더구나 경천에 살지도 않는다 다만 경천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을 뿐이기에 인연이 닿아서 몇 자 적어본 것이다.
사실에 정확하게 근거하지 못함이 유감이며 본인도 안타까운 미음을 여기에 적어보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삼남대로 길[옛길]을 탐방하는 순례객들이 많이 계신 줄로 알고 있다.
이분들의 노고에 도움을 드려야 하는데 참으로 안타깝다.
순례 중에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나 건물 또는 징표가 되는 시설물들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기는데 경천역을 알릴 수 있는 비석이 순례길을 벗어나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하루빨리 시정되길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잘못된 부분도 있을것이기에 지적해주시길 바랍니다.
추신[追伸]~
경천역 이야기를 집필중에 인터넷 검색을 많이 하였습니다.
일반인들의 블로그 글이나 기자님들의 기고문 그리고 순례객들이나 여행자들의 글중에 오류[誤謬]가 있어 여기에 적어봅니다, [오타 아님]
저는 삼남길 강진에서 한양까지 중에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구간에만 언급[言及]합니다.
경천 중학교 앞에서 시작하여 계룡면에서 갑사 들어 가는 길목부터는 어사길입니다.
물론 수많은 [암행]어사나 장원급제하신분들이 지나가셨던 길이지요.
유배지로 먼길 떠나는 당시의 수많은 죄인들도 지났구요.
하지만 이몽용은 아닙니다.
그는 소설속의 인물이지 실제 인물은 아니니까요?
금대리가 가수 정태춘의 고향이 아닙니다.
정태춘은 경기도 평택시 팽성읍 도두리 출신입니다.[1954년 3월 출생]
어느분이 금대리 [황새울과 삽작골]가 고향이라 적었네요.
금대리는 장기정씨[長鬐鄭氏] 집성촌이기도 합니다.[봉서재가 금대리에 있습니다.]
용두천은 전국에 수십곳에 달합니다.
경천리의 용두천은 그 길이가 짧습니다.
경천 저수지에서 노성천 합류 지점까지입니다[약 2,5km 정도]
천안시 병천면의 용두천 하고는 맞지 않습니다.
중간에 금강이 지나는데 어떻게 연결이 되나요?
경천리 2구 성밑 마을 입구에 서 있는 비석3기는 위치상 잘못 설치되어 있습니다.
경천역 사음 박준학 청덕 시혜비 때문에 삼남길 순례객들의 인증샷 장소이지만 이곳은 삼남길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편리상 경천 장터에서 나와 이곳을 둘러보고 그대로 냇가 둑을 따라 노성 방면으로 걷지만 잠깐 삼남길에서 이탈한 것이랍니다.
하루 빨리 시정되어 제자리에 설치되어야 합니다.[삼남길에]
대부분이 경천역 사음 박준학 청덕 시혜비중에 박준학[朴準學]인데 박준혁으로 잘못 쓰여져있습니다.
이것은 한사람이 잘못 풀이해서 올린것을 그대로 따라 적은것 같네요.
경천역 안내판에도 분명 박준학으로 쓰여있습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한자[漢字[ 또는 한문[漢文]을 모르기에 누가 오역[誤譯]해도 그대로 답습합니다.
컴 자판이나 스마트 폰에 한자앱을 설치해서 풀어 보면 쉽게 답을 얻는데 말입니다.
너무 편의 주의인가? 귀차니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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