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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경천 장터의 哀歡(19). [218] 본문
최인태의 세상이야기 T스토리입니다.
방문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경천 이야기 시리즈로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경천 장터의 애환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 술픔과 기쁨이 공존합니다.
제가 기억하는 시공간은 1960년대가 대부분입니다.
1954년 경천리 에서 태어나 1971년 봄에 고향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장마당의 애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사는 슬픈일과 기쁜일이 항상 공존 한다고 할수 있지요.
보릿고개를 넘어야 하는 그시절에 슬픔은 기쁨보다 두배정도 느끼는 감정이 더 했을 듯합니다.
이유는 하나를 얻으면 그 자체가 기쁨이였구요.
하지만 반대로 하나를 잃으면 둘셋을 잃은 만큼의 아픔이 동반 되었을 겁니다[사실 잃을것도 별로 없던 시절였으니까요?]
이 글을 처음 읽는 분이나 그 시절 경천 장터를 직접 구경 하지 않으신 분은 선뜻 이해하기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장터의 흔적은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1960년대의 우리나라 인구를 생각해보세요.
경천 초등학교의 학생이 천여명이 넘어서자 콩나물 교실과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공부하였습니다.
1969년에 상성리에 분교가 설립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장터의 규모는 그대로 유지되었답니다.
경천리가 공주군의 경계지점이라서 불리한 점이 한둘이 아니였답니다.
1930년 당시 계룡면장이던 정인각이 면사무소를 경천에서 월암리로 이전 하였지요.
정인각은 현 정진석의원의 조부로 계룡면 하대리 출생입니다.
당시 경천리는 면사무소와 지서등 관공서와 각종 편의 시설 그리고 장터와 삼남대로의 길목이였습니다.
호남지방에서 한양으로 아니 당시에는 경성으로 가는 길목이였으며 조선시대에는 경천 역참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구요.
물론 월암리도 삼남대로 길목은 맞습니다.
지금의 23번 국도가 [신작로] 만들어지면서 자동차의 통행은 상월에서 하마루를 지나 월암리를 경유해서 공주 방향으로 올라갑니다.
경상도의 화개 장터 처럼 지역을 가리지 않고 공주군 사람들과 논산군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화합의 장마당이였던 것입니다.
장마당의 가장 큰 거래는 우시장이였을겁니다.
제가 고향을 떠나는 1971년 정도에 누렁이 황소 한마리 값이 제 기억에는 12만원[맞는지 모릅니다만]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축시장 부근에는 소와 돼지 그리고 염소와 토끼, 개, 닭등이 거래되었습니다.
특히 논 밭 갈던 소는 모내기 철이 끝나거나 가을 걷이가 끝날 때 쯤에 많이 거래가 되었을겁니다.
소 한마리는 재산 목록 1호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 했지만 자식들 교육을 위해서 아니면 아들딸의 결혼 비용으로 어쩔수없는 거래였답니다 .
그 다음으로 웃음 소리가 크게 들리는 곳은 쌀을 거래하는 싸전이였습니다.
당시의 하얀 쌀은 그 자체가 현금이며 돈이였습니다.
가을 걷이가 끝나면 정부 매상으로 나가는 벼를 제외하고 방앗간을 거쳐 이곳에서 거래가 되었습니다.
이곳을 기웃거릴려면 논농사를 많이 짓거나 돈이 많아서 쌀을 사려는 사람 뿐이였을겁니다.
싸전 마당 한켠에는 각종 잡곡들도 가득 가득했구요.
특히 전문으로 매입하는 중간상인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이들은 이곳에서 매입한 곡물은 트럭에 실려 도시로 아니 서울로 올라 갔을겁니다.
가축시장과 싸전은 기쁨으로 가득한 웃음 소리가 들리는 장마당이였습니다.
장날은 시끄럽고 북적이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한창 물건을 사고 팔며 장마당이 무르익을 무렵 갑자기 큰 소리가 납니다.
도둑이야... 쓰리꾼이다... 저놈 잡아라...
이게 뭔일이래요.
소매치기가 나타난것입니다.
계룡지서에서 순사[경찰] 한분이 자전거 타고 왔지만 혼자서 소매치기를 잡거나 소탕하는일은 불가능했습니다.
어느 아주머니가 싸전에서 곡물을 팔고 받은 돈을 주머니에 넣고 금방 돌아서서 물건울 사고 돈을 꺼내려고 보니 돈이 한푼도 없는것입니다.
그 돈은 식구들의 옷도 사야하고 어른들 드실 생선 몇마리도 사야하는데 쓸곳은 많은 얼마되지 않는 돈이였지만 말입니다.
당시의 어머니들은 지갑이나 핸드백도 없이 그냥 주머니에 넣고 다녔던것이지요.
주머니 역시 단추나 지퍼가 있는것도 아니며 더구나 주머니 덮개 자체가 없어 맨눈으로 보아도 돈이 보였습니다.
농사 지은 곡식을 팔아 그 돈으로 장을 봐야하는데 가진 돈을 몽땅 도둑 맞은 아주머니의 눈물속에 동동구르무 장사의 하모니카 소리가 오늘 따라 크게 들려 오고 있었다.
하루는 장마당 골목에서 아이들이 모여서 풀빵을 먹고 있더군요.
당시의 아이들은 주머니 돈이 없었습니다.
설령 부모님이 줬다해도 혼자 먹을 돈도 안되는데 이놈들 봐라...
야 너희들 돈이 어디서 나서 빵을 사먹냐고 물으니 손가락 두개를 구부렸다가 펴는 시늉을 보이더라구요.
쓰리질 했답니다.[소매치기]
누가 했냐고 물으니 후배되는 녀석이 자랑스럽게 나서면서 풀빵이나 먹지 뭘 그런거를 묻냐고 뭐라고 지랄하더군요..
이놈은 아마추어지만 아마도 공주나 논산에서 출장 나온 전문가라면 이날 많은 돈을 갈취해갔을겁니다.
순진한 시골 아이인줄 알았는데 어린 나이에 벌써 이런짓이나 하고 있었으니 지금 이친구도 60대 중반의 할아버지가 되어있을텐데
이날 돈을 잃고 애통해 하신 분들의 마음은 슬픔 그 자체입니다.
장에 다녀 오려면 하루 해가 짧은데 막내딸 이쁜이가 자꾸 따라 온다.
어머니는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양손에도 들었으니 돌아 서서 집으로 어서 가라고 소리치신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가고 아직 미취학이라 혼자 남은 아이가 집에 홀로 있으려 하지 않는다.
눈물에 콧물이 범벅이 된 얼굴의 아이는 절대로 돌아설 마음이 없다
어머니 뒤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라가다 엄마에게 들키면 엄마는 작은 돌멩이를 집어던진다.
어여 집으로 가아... 어여.. 이때 어머니의 입에서는 찰진 욕이 나온다.
그래도 아이는 결사적으로 쫓아간다.
장터까지의 거리에 절반을 따라간 아이는 결국 어머니와 함께 장마당에 들어 선다.
꼬마 아이의 눈에 보이는 장마당은 별천지나 다름 없어 보였다.
먹을것 입을것 눈으로 보이는 모든것이 새롭고 신기했으나 어머니는 어느것 하나 사주지 않았다.
대신에 함께 장에 간 이웃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풀빵 한개 그리고 한참후 동네 어른이 손에 쥐어 주는 눈깔 사탕이 전부였다.
그 소녀가 서울로 시집을 갔으니 지금은 잘살고 있겠지...
아마도 이글을 읽는다면 옛생각에 눈물 지으며 엄마 얼굴 그려보며 그 시절의 경천 장마당을 추억으로 아니 기억으로 여행을 할것 같다.
경천 마을에는 엿을 취급하는 고물상이 두군데였습니다.
당연 장날에는 엿을 팔았구요.
리어카에서 파는 아저씨는 가위춤을 신나게 추며 엿판의 흥을 돋구고 있네요.
지게에 목판을 얹고 파는 아저씨 역시 엿가위를 신나게 흔들며 엿치기 시합의 흥을 돋구고 계십니다.
엿치기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술 한잔의 기분에 하시는데 이것이 도박성 게임이거든요.
엿가락을 고른 다음 양쪽 끝을 쥐고 힘을 주면 딱하고 부러지는데 이때 곧바로 입에 대고 불어 주어야한다.
엿을 만드는 공정에서 엿가락 자체에 공기를 넣어서 이미 작은 구멍들이 많은데 이때 입김을 불어 넣으면 구멍의 크기가 약간 넓어지라고 신나게 불어댄다.
구멍의 크기는 엿파는 아저씨 마음대로다 물론 누가 보아도 크게 보이면 당연 이기는 게임이지만...
이때 옆에서 구경하다가 괜히 참견한다 어라 이 아저씨 엿의 구멍이 더 커요하고 함께 소리쳐준다.
그래서 이기면 옛다 이거 너 먹어라 하고 건네 준다...
왜냐하면 지는 사람이 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엿 판매의 전설이 되신 윤팔도 선생의 말에 의하면 어린 시절 경천의 엿만드는 공방에서 숙식을 하며 엿을 만들고 판매하는것을 배우셨다고 한다.
윤선생은 14세 되던해 엿장수를 시작했는데 그곳이 필자의 고향인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 성밑 마을인것으로 판단된다.
경천에는 고물상 집은 두곳이지만 엿을 만드는 공방은 우리 동네 한곳뿐이였기에...
인터넷상의 김문기 기자의 블로그에 소개되 내용중에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고자 한다.
경천리는 한자로 [敬天里]인데 이분은 경씨가 천명이 사는 동네라고 적고 있기에...
경씨가 천명이면 한자로는 [慶千]이여하므로...
물론 청주 경씨가 용머리와 등정골에 몇가구가 살고 있었지만 ...
엿만드는 공방에 우리가 놀러 가면 일단 방바닥이 찜질방 수준이였다.
엿을 고느라 하루 종일 대형 가마솥에 불을 지폈으니 어린 나이에 집을 나온 선생이 기거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던 것이다.
방은 뜨끈 뜨끈하지, 엿물로 밥해먹지 방세도 안받았으니 안성맞춤이였을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아저씨들은 젊은 총각[전라도가 고향이라했다]과 할아버지 정도의 노인 3분이 계셨다.
엿장수는 완전 자유로운 영혼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말그대로 엿장수 마음대로였지요.
맨 몸으로 찾아와도 반겨주며 당연 지게와 엿 목판 그리고 엿까지 제공됩니다.
아침에 갖고 나가서 고물을 많이 가져오면 고물값으로 정산하는 시스템이였습니다.
제 기억에는 겨울철에는 아저씨들이 많이 보였구요.
들쑥 날쑥이였을 겁니다 아마도...
이분들은 낮에 고아진 엿을 밤새 잡아 당겨 흰엿으로 변신 시킨다.
처음에 고아진 엿은 갱엿이라해서 갈색을 띄지만 벽에 막대기를 걸고 홀로 잡아 당기는 방법과 두분이 마주 보고 서서 계속 잡아 당겨 주면 점차 흰색으로 변해간다.
잡아 당길수로 공기가 들어 가서 구멍도 만들어 진다.
방이 더워서 밖은 눈내린 한겨울이지만 아저씨들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흘러 내린다.
내일 팔러 가는 엿은 토막 토막 자르거나 넓게 편채로 준비를 마친다 이때 부스러기는 구경꾼인 우리에게 돌아온다.
사실 우리도 엿을 얻어 먹을 자격이 있다.
어린 우리는 산에 올라가서 솔방울은 채취해오면 당시 돈으로 약 100원 정도 주신다.
내 기억에 14살 어린 소년의 엿장수는 기억에 없어 아쉽다.
윤선생께서 경천을 떠나고 한참후 태어났으니 당연한 일이지요.
윤선생님을 생전에 만나 보지 못한 것이 한스럽게 느껴 진다.
1960년대는 국회의원 선거와 대통령 선거가 몇번 있었다.
특히 경천 장날은 선거 유세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다.
몇번의 선거구 개편이 있었지만 대통령 선거는 공주 논산 가리지 않았지만 국회의원 선거는 조금 이상 했다.
장마당에는 논산군 주민들도 많았지만 선거구가 달랐으므로...
그후 두명의 당선자를 뽑을 때는 똑같은 후보의 공주 논산 유권자 였다.
그래도 장날이면 지프차 지붕위에 확성기를 얹고 장마당 가장 넓은곳을 차지하고 열변을 토하고 계셨다.
내 기억에는 6대 선거에서는 민정당의 박찬 후보와 민주 공화당의 박충식후보가 맞 붙어 박찬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7대 선거에서는 민주 공화당의 김달수 후보와 신민당의 박찬후보가 경합을 벌였으나 김달수 후보가 당선되었다.
어린 아이지만 어른들 만큼 관심이 있었다기 보다 무슨 소리인지 몰라도 듣기에는 좋았다.
마이크를 잡기전에 날달걀을 먹는 것도 신기했으니까...
우리 동네에 신민당 후보였던 박의원의 친척이 살고 있어서 박 후보의 지프차가 동네에 몇번 왔다 갔다.
촌 동네에 지프차가 들어 오면 아이들은 무조건 뛰어 가서 구경 했다.
당시 어른들이 여당 야당 하는데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화당이면 공화당이고 신민당이면 신민당이지 무슨 소리인지 원....
경천 장날 모이는 사람의 숫자 즉 유권자의 숫자이며 그들이 의식하는 표밭이였기 때문이다.
그날 따라 장터 바로 옆 양조장의 막걸리는 두세배 이상 만들었다고 한다.
고무신 가게는 모르겠다...정말입니다...
음력으로 7월15일은 백중날입니다.
그러니까 백중날 며칠 앞서는 장날이면 백중 장날이라고 했습니다.
이때는 장마당이 더 대단해집니다.
이날은 전국적으로 머슴들의 명절이라해서 공식적으로 하루 쉬는 날입니다.
그냥 쉬는게 아니라 주인에게서 얼마 정도의 수고비나 용돈정도 아님 옷이나 신발을 사주기도 한답니다.
사실 당시의 머슴들은 명절날도[추석] 제대로 쉬지 못합니다.
주인집의 모든 뒤치닥거리를 해줘야 하며 소의 여물이나 꼴도 준비해서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백중 장날은 그런것 안해도 되는 날이였습니다.
장에 가지 않으면 본가에 가거나 조상님 산소에 성묘도 다녀오고 했답니다.
씨름판이 벌어지고 1등에게는 송아지 1마리가 부상으로 주어집니다.
그옆에는 서커스가 자리잡고 손님을 기다리며 소방서 마당에는 가설 극장이 며칠전부터 노랫소리를 크게 틀어줍니다.
그야말로 경천 장터는 축제의 마당이였으니까요?
이때의 날씨는 가장 더울때 이기도 합니다.
아침 일찍 소달구지에는 수박을 가득 싣고 장마다에 쌓아 놓으며 옆에는 노란 참외가 산더미 처럼 쌓입니다.
아무리 많아도 파장이 되기전에 모두 판매가 됩니다.
모두 부족한 시절이였지만 그래도 마음 만큼은 풍족하게 살았을 때입니다.
그렇게 경천 장마당의 하루가 지나갑니다.
장터의 한쪽에는 고기를 파는 가게가 있습니다.
장 전날 잡은 돼지고기입니다.
당시는 냉장고가 없어 모든 고기가 신선하고 사료를 먹이지 않아서 아주 맛이 좋았답니다.
하지만 돼지고기 두세근을 사는 어머니의 표정은 그렇게 밝지는 못합니다.
며칠후 군입대하는 아들에게 먹이려고 사는것이지만 걱정이 앞서기 때문일겁니다.
1960대 군대는 최장 36개월 근무해야 했으며 전쟁이 멈춘지 10년이 조금 지난 시절이였으니까요?
군대 가면 총맞아 죽지는 않겠지만 고생은 뻔한 것이였으니까요?
더구나 1963인가 64년부터는 월남으로 차출되어 사지로 가는 아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날수밖에요.
군대가서 힘내라고 없는 돈에 돼지 고기를 먹여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이지요.
당시의 군입대는 개인별로 가는것이 아니라 인근 동네의 나잇대가 같으면 하마루 정류장에서 버스타고 가까은 연무대[논산 훈련소]로 가거나 그 이전에는 경천 장마당으로 군용 트럭이 와서 실어 갔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동넷사람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잘다녀오길 빌었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입대하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돌아 서서 눈물을 흘리셨지요.
1965년 어느 여름날로 기억됩니다.
어려운 살림에 부모님은 장날 우시장에서 송아지 한마리를 사오셨습니다.
아침 일찍 장에 나가신 부친께서 고르고 골라서 튼튼해 보이는 송아지를 점심 무렵에 끌고 오셨습니다.
들에 나가 우리는 소먹이인 소꼴 즉 여린 풀들을 골라서 베어 왔습니다.
그런데 이 풀들을 먹어야 하는 송아지는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저녁 무렵 아버지는 무언가 크게 잘못된 것을 알고 멀리 계시는 수의사를 모셔왔습니다.
진단 결과는 장담못한답니다하면서 소의 항문에 오른손을 길게 넣고 휘젓고 계시네요.
송아지는 이미 늘어지기 시작하고 어머니는 마루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계시네요.
결국 송아지는 그날밤을 못 넘기고 하늘 나라로 올라 갔습니다.
현재의 송아지 값을 계산해도 2~3백만원이 날라간것입니다.
원인은 고창증이랍니다.
송아지 주인은 아침에 장으로 떠나기전 불쌍한 마음에 등겨를 여물에 잔뜩 뿌려준것이라네요.
소들의 이빨은 아래에만 있습니다.
처음부터 사람 처럼 씹어서 삼키는 것이 아니라 일단 넘겨 놓고 다시 꺼내 되새김으로 소화시키는 것이지요.
그래서 소와 염소는 위가 4개거든요.
보통은 등겨를 소 먹이로 줄때는 물에 풀어 주거나 여물에 섞어서 안전하게 먹을수있게 해주어야 하거든요.
당시는 사료가 없어 풀과 곡물, 짚이나 농사 부산물 그리고 등겨나 사람이 먹고 남은 음식도 같이 먹였답니다.
그런데 송아지 주인은 그대로 여물위에 뿌려 놓았으니 당연 질식사한것이지요.
경천 장마당의 비극으로 그해 여름은 길고도 지루하며 무지하게 더웠답니다.[우리집만요]
명절에 서는 장마당은 대목장이라해서 대단했습니다.
명절 열흘전에 서는 장은 작은 대목이라 부르고 명절 며칠 앞둔 장은 그야말로 대목장이라서 없는것 빼고 다 있었지요.
우리 모두를 즐겁게하는 장날의 품목은 당연 옷이였지요.
어른 아이 없이 모두 새옷을 입을수 있었으니까요.
먹을거리 역시 풍부해서 걱정이 없었구요.
서울이나 멀리 나가 있는 식구들이 명절에는 맛있는 선물을 가득 들고 고향을 찾아 왔답니다.
대목장에 걸맞게 가설극장도 막이 오르고 노래자랑인 콩클대회도 준비가 한창이였습니다.
가설극장은 보통은 10여일 이상 상영하고요.
영화상영도 흥행을 위해 상품을 준비합니다.
보통은 1등부터 5등까지인가 암튼 상품을 극장앞에 며칠간 전시해놓거든요.
그런데 극장이나 노래자랑 역시 하늘이 도와야합니다.
비바람이 불거나 늦은 태풍이라 올라오면 모두 망하는 게임이거든요.
콩클대회도 3~4일 열립니다.
신청자도 많고 그만큼 상품도 많았답니다.
하지만 1등 금반지는 지금까지도 본 사람이나 받은 사람이 없다는게 신기합니다.[주최측 농간으로].
2023년에는 상상이 안되는 그시절의 경천 장마당에 모습이였습니다.
어린 소년의 기억으로 더듬어 보는 경천 이야기가 19편에 이르네요.
틀린 부분이나 잘못 그려진 이야기도 있을겁니다.
사실에 맞지 않을수도 있습니다.
혼자만의 기억이 역부족이라 몇사람에게 전화해서 물어 보고 여기 저기 사료도 찾아 보았지만 역시 한계가 있네요.
글이란 혼자만의 추측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도움도 필요하구요.
그런데 기대했던 그대들의 무관심으로 핀잔만 받는 일이 되어 죄송한 마음입니다.
경천 이야기는 쭈욱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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