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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그 시절 경천의 사냥을 추억 하다(14) [169] 본문
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블로그입니다.
방문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1960년대 초중반으로 기억합니다.
당시에는 동물 보호법도 없었을 것이며 있다 해도 산골동네까지 단속하지 못했을 겁니다.
시골에 아니 산골에 겨울이 깊어 가는 어느 날에 우리 동네에 군용 지프차를 개조한 지프차가 도착하네요.
당시의 사냥꾼들은 빨간 모자를 착용하고 가죽잠바를 입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마을 어귀에서 다마치기 [구슬치기] 놀이를 하다가 모두 달려갑니다.
산골에 볼만한 구경거리가 나타난 것입니다.
엽총은 장총으로 보기만 해도 무서웠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말은 그 사냥꾼 아저씨가 우리에게 총구 방향으로 서있거나 가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안전을 위한 주의 사항이었지요.
그리고는 우리에게 물었습니다.
어디에 꿩이나 토끼가 많으냐고요.
우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기 가면 많아요~
저쪽 저 산 넘어 말이여 유우~
덩치 큰 몇 녀석은 가이드로 선발되어 사냥꾼 아저씨들과 산으로 오릅니다.
한참을 헤매다 휴식하는데 서울에서 가져온 과자며 빵을 나누어 주는데 세상에 이런 맛이 있는가?
지금도 그때 얻어먹은 간식이 무슨 빵인지 이름도 모양도 뚜렷하게 생각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합니다.
소득은 없지만 이제는 산에서 내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집으로 들어가네요.
30여 호의 작은 산골 동네지만 우리 집은 외딴집으로 산바로 아랫 첫 집이었습니다.
조부모님과 10명이 넘는 대 가족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반갑게 맞이하시면 사랑방으로 모시고 들어가셨습니다.
부엌에서는 어머니와 누나들 할머니까지 모두 바쁘게 움직이십니다.
사냥하시는 아저씨는 모두 세명으로 기억합니다.
다음날 아침에 다시 산으로 사냥을 올라가시네요.
이번에는 애들은 저리 가라 하시고 어른들이 동행하시네요.
이산 저산에서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그 소리 나는 방향을 잘 기억해놓습니다.
사냥꾼들이 돌아가면 그 자리로 찾아가서 탄피를 주워옵니다.
당시의 엽총 탄피는 두껍고 색이 진하며 종이로 만들어졌지만 아주 단단해서 장난감이나 장식용으로 아주 훌륭했습니다.
누가 더 많이 찾느냐 이것도 중요했거든요.
아이들의 사적 재산만큼의 가치가 있었거든요.
당시에 탄피 한 개면 구슬[다마] 10개나 20개 이상의 가치였을 겁니다.
다시 어두워지면 사냥꾼 아저씨들이 돌아오십니다.
허리춤에는 그날 잡은 꿩 몇 마리가 걸려있고요.
그사이 나는 주전자를 들고 양조장을 다녀옵니다.
사냥꾼 아저씨들 대접하려고요.
그렇게 며칠을 묶고 가시네요.
밤늦도록 사랑방에서는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들려오네요.
숙박비를 받으셨는지 그냥 대접하셨는지는 모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꿩고기를 얻어먹은 기억이 절대로 안 나는 것입니다.
몇 년 후 어느 날 겨울 방학이 시작되어 아침 일찍 지게를 지고 뒷동산으로 나무하러 올라갑니다.
마을 어른들은 새벽같이 모두 모여서 먼산 나무하러 떠나셨고요.
여기서 먼산 나무는 계룡산 정상부까지 올라가서 온갖 잡목을 낫이나 톱으로 잘라서 새끼줄이나 칡덩굴로 묶은 후 지게 지고 내려오는 겁니다.
해 질 무렵이면 저 멀리 신원사 계곡부터 나무꾼 아저씨들의 행렬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 집에는 큰 형님과 막내 숙부님이 다녀오시고요.
지금은 경천저수지가 가로막았지만 당시에는 양화리 동네와 신작로가 있었지요.
혼자서 투덜투덜 산으로 오르는데 꿩 여러 마리가 죽어있네요.
경천 주막거리 아저씨가 싸이나 [청산가리]를 놓은 모양입니다.
일단 꿩을 3마리 주워서 지게 바소쿠리 넣고 솔잎과 나뭇잎을 긁어모아서 감추고 나무를 한참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주막거리 아저씨가 올라오고 계시네요.
꿩의 임자이지요.
야 너 여기서 꿩 죽은 것 못 보았냐고 물으시는데 가슴이 쪼그라드네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못 봤어요...
너 그냥 꿩 가져가면 안 된다 하면서 위로 올라가네요.
그 뒤로 나무 하다 말고 그대로 집으로 내려왔습니다.
그 아저씨가 따라올까 봐 집에서도 한동안 꿩을 꺼내 놓지 못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니 그 아저씨가 꿩을 몇 마리 더 주워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시네요.
그날 저녁에 우리 집에는 꿩고기 잔치를 했습니다.
싸이나 [청산가리]를 구하면 콩에 작은 구멍을 뚫습니다.
그 안에 약을 넣고 촛농으로 막으면 됩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작은 콩알에 구멍 내는 일이 어렵지요.
저는 어려서 구경만 했고요.
다음으로는 가을에 말린 시래기 무청을 가져와서 중간중간에 약을 넣고 돌돌 말아 감쪽같이 숨겨놓습니다.
산으로 올라가서 꿩이나 토끼가 지나가는 길목을 찾아서 콩을 뿌려놓으면 꿩들이 주워 먹게 됩니다.
시래기 무청은 토끼를 잡기 위한 것인데 토끼들의 길목이나 밭 주변에 작은 막대기를 꽂은 후 거기에 매달아 놓으면 토끼들이 아주 맛있있게 뜯어먹게 됩니다.
토끼나 꿩들이 약을 먹은 후 소화되기 시작하며 약이 흘러나와서 죽게 됩니다.
당시에는 꿩이나 토끼는 많았는데 제 기억에 우리 동네 경천에는 멧돼지나 고라니는 기억이 없습니다.
어른들의 구전에는 온갖 동물들이 나오지만요.
그중에 계룡산 남매탑이 가까워서 그런지 호랑이에게 물려가는 이야기가 제일 많았습니다.
나무하러 계룡산에 가셨는데 고왕암 부근[당시는 광암 절이라고]에서 호랑이를 보았다고 하는 그런 내용들입니다.
양화리에서 신도안 넘어가는 용칭이고개에서 만나기도 하고요...
정확하게 1966년 11월의 어느 날로 기억합니다.
추수를 끝낸 논에 온 식구가 모여서 보리 파종을 하느라 열심히 일하는데 갑자기 논두렁이 시끄러워지네요.
돌아보니 경천 중학교 전교생이 산으로 오르고 있습니다.
남녀공학으로 당시에는 모두가 검은색 교복을 착용했습니다.
맨 앞에는 큰 북을 들고 앞장서며 중간중간에 선생님들이 보입니다.
당시의 괘등산은 나무들이 별로 없어서 산 전체가 보였습니다.
북을 들고 맨 먼저 산 정상으로 오르고요.
나머지 학생들은 산 전체를 둘러쌉니다.
잠시 후 정상에서 북을 치면 그 소리에 맞춰 학생들이 산으로 오르면서 토끼몰이를 시작합니다.
한참 후 산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옵니다.
토끼가 나타난 것입니다.
남학생들이 죽기 살기로 달려드네요.
그 후로 계속해서 북소리는 토끼들의 장송곡이 되어 울려 퍼집니다.
학생들 무리가 정상에 다다르면 토끼몰이가 끝나게 됩니다.
하산은 올라갔던 곳의 반대 방향인 다롱고개 신작로 길로 해서 학교로 돌아갑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당시에 1960년대 경천중학교 동문들은 정확하게 기억하실 겁니다.
그날 잡은 토끼는 누가 먹었는지는 상상에 맡겨보겠습니다.
당시 중학생은 지금은 70대 초중반이 넘으셨을겁니다.
아마도 이글을 보시는 분이 거의 안계실것 같네요.
경천 장마당의 철물점에서 가느다란 철사줄을 구입합니다.
벤치 하나와 낫과 톱을 들고 산을 오릅니다.
토끼 잡는 올무를 놓는 일입니다.
올무는 동그랗게 말아서 토끼의 머리 높이 맞춰 설치하고요.
혹시 멀리 달아나면 못 찾게 되니까 옆에 굵은 나무 밑동에 단단히 결속해놓습니다.
올무를 가운데로 해서 양쪽으로 어느 정도 길 막이를 해놓습니다.
여러 장소에 올무를 설치해놓으면 다음날부터는 고생길입니다.
사실 날마다 찾아보아야 하거든요.
며칠 지나면 토끼가 상하거나 다른 사람이 가져가니까요?
약을 놓았을 때도 마찬가지고요.
죽 쒀서 개 좋은 일하기 딱 좋거든요.
저처럼 나무하러 왔다가 횡재하기도 하고요.
고생만 하고 한두 마리 정도로 만족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가져갔어도 억울해하진 않더군요.
다음 해에는 참새 잡이용 대형 그물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대나무 두 개를 세우고 참새용 그물을 걸친 후 동네 아이들 모두 불러서 새를 모아 오면 그물에 참새가 걸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무슨 참새가 그리 많은지 몇 군데 옮겨 다니면 수십 마리 아니 수백 마리 정도 잡습니다.
우리 집 마당에서 삼태기를 작은 막대기로 세워놓고 그 안에 벼 낟알을 몇 개 뿌려놓은 후 기다립니다.
그러면 참새들이 삼태기 안에 먹이를 먹으러 들어갑니다.
이때 줄을 잡아당기면 삼태기가 엎지면서 새들이 안에 갇히게 되는 원리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손을 넣어 참새들을 잡아야 하는데 대부분이 놓치게 됩니다.
어쩌다 재수 없는 참새 한두 마리는 잡게 되네요.
군용 손전등[ㄱ 기역자 형태]을 들고 밤에 대나무 밭으로 가거나 노간주나무 사이에 손을 넣고 맨손으로 잡는 방식입니다.
저는 당시 어리고 손전등 구입할 돈도 없고 물론 집에도 없었고요.
있다 해도 건전지 닳는다고 손도 못 대게 했을 겁니다.
그외 여러가지 방법이 있었을겁니다.
제목이 사냥 이야기이지만 제가 어린 나이라서 여기까지입니다.
실제로 해본 경험은 거의 전무하거든요.
60년 전의 기억을 살려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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