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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

나의 군 시절 [151]

현덕1 2022. 3. 2. 20:26

최인태의 세상이야기 블로그입니다.

방문해주신 모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신체검사 통지서가 배달되었다.

대전 병무청으로 집결하라는 내용이다.

본인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출생신고가 엉망이 되어있었다.

동갑내기 친구들은 이미 제대했거나 한창 복무 중이었다.

고향에 들렀다가 대전의 병무청으로 들어갔다.

1박 2일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마지막 날 오전에 최종 학력으로 편을 갈랐다.

저쪽 편 애들은 현역 입대란다.

우리 쪽은 모두 방위병이거나 보충역이란다.

 

다음 해 어느 봄날에  입영통지서 날아들었다.

공군 54*2 부대로 08시까지 입소하란다.

잘 아는 지인을 통해  원하는 금액을 지불했다.

체육관 안에서 10여 명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현역[병장] 병이 우리들을 돌아보며 한마디 한다.

밥맛없는 새끼들은 집으로 돌아가란다. [부적격자]

 

그리고 한 달 후 다시 입영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육군 63 훈련단으로 입소하란다.

지인을 찾아가 이야기하니 이제는 어쩔 수가 없단다.

에라 자기는 공군은 되는데 육군은 안된단다.

햇살이 따가운 6월 초에 용인에 있는 부대에 입소한다.

평택에서 버스를 타고 수원 터미널에서 다시 용인행 버스를 이용한후 터미날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훈련소 입구에서 하차하여 도보로 위병소를 통과했다.

그런데 택시에서 내리거나 어쩌다 자가용을 이용한 사람은 위병소 뒷마당에서 통닭을 튀겼다.

 

입소 절차를 마치고 오후에 한 곳에 모아 놓고 특기별로 인원을 차출한다.

요리사 나와, 이발소 경력자 나와, 목수 나와, 전기 기술자 나와, 세탁소 나와,

미장공 나와 온갖 직종을 불렀으나 나는 끝까지 함구했다.

다음날은 일요일이라서 교육은 없고 지급받은 피복을 들고 세탁비누 1개를 들고 용인 시내를 관통한 경안천 냇가에서 빨래를 한 후 둑에 널어 말린다.

월요일부터 교육인데 연병장에서 사람 잡는다.

나는 차라리 죽음이 좋지 선착순은 싫다.

몸치 중에 몸치로 태어났으니 달리기는 영원한 꼴등이다.

운동횟날이 나에게는 악몽이었다.

선착순 5등까지만 남고 나머지는 계속 달려야 한다.

하루에 수십 번을 달려도 나는 헤어날 수가 없다.

 

다음날 교육은 pri 였다.

높은 포복 낮은 포복에 철조망 통과 사람 잡는다.

오늘 또다시 시작된 선착순 이번에는 산꼭대기의 나무이다.

저 멀리 보이는 나무를 터치하고 돌아와야 한다. 

오늘도 선착순은 어김없이 5명이다.

한참을 뛰어오르다 작은 소나무 뒤에 납작 엎드렸다.

얼마 후 1등이 지나고 2등이 달려 내려간다.

그 순간 3등으로 죽어라 뛰었다.

겨우 4등으로 선착순에 성공했다.

우리 5명은 남고 나머지는 다시 뛰어간다.

이대로 끝나는 줄 알았는데.

독사 대가리를 한 조교가 우리 5명을 세워놓고 한마디 한다.

이중에 양심불량자 나오면 용서해주겠다.

내가 다 알고 있으니 자수하여 광명 찾으란다.

순간 갈등이 왔지만 자수하면 반 죽음이 뻔한데 내가 바보냐...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오는지 이를 악물고 참았다.

다음번 선착순이 내려오니 우리 보고 그늘로 가서 쉬란다.

그 후로도 선착순은 몇 번 더 뛰었다. 

 

며칠 후 오후 교육이 시작되었다.

6월의 뜨거운 햇살은 죽음보다 무서운 졸음이 밀려온다.

교관의 목소리는 더욱 줄어든다.

일부러 졸리게 만드는 군대 기술이다.

여기저기서 목덜미가 앞으로 살짝살짝 수그러질 때 이를 핑계로 전체 기합이다.

높은 포복으로 산등성이를 넘는다.

잠시 짧은 휴식시간이 주어진다.

그런데 식곤증에 갈증이 찾아온다.

무더위에 그늘에 앉아있어도 이마에는 땀방울이 연신 떨어진다.

요 아래 논으로 흘러가는 도랑을 보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달려 내려간다. 

그런데 소총이 걸리적거려서 늦을 것 같아 잠깐 소나무에 걸어 놓은 후 달렸다.

진짜 0,5초 같은 시간에 도랑물을 원 없이 마시고 돌아오는데 걸어 두었던 칼빈 소총이 없어졌다.

이미 집합하라는 호루라기 소리는 끊어진 지 오래다.

눈이 뒤집혀 찾아보았지만 안 보인다.

할 수 없이 빈손으로 갔다.

교관 이하 조교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느 놈이 든 한놈만 걸려라.

거기에 내가 걸려들었다.

빈손으로 돌아가는 나를 교관이 뚫어지게 쳐다보며 부른다.

군인이 소총을 잃어버리면 군법회의에 회부된다.

당장 영창에 갇히는가 보다.

헌병들이 달려오려나...........

 

나 혼자 남고 나머지는 오후 교육이 다시 시작된다.

철모 위에 대가리 박고 뒷다리 하나는 들어 올린다.

방위병이 나를 일대일로 지키며 보초를 서고 있다.

내가 옆으로 넘어지면 발로 걷어찬다.

똑바로 못하나...

에고 이제 나는 죽었다.

순간 어머니 얼굴이 떠오르며 하늘이 노래진다.

잠시 후 모두 포기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면 기분이 묘해진다.

죽이지는 않겠지만 고생은 할 것이다.

아직 계급이 없고 군번도 없으니 영창은 못 갈 것이고 오늘 저녁에 늑골이 부러지도록 얻어 터질일 만 기다릴 것이다.

두 시간 정도 홀로 남아서 대가리 박고 있으니 조교가 달려온다.

기상하란다.

당연히 나의 소총도 옆에 나무에 걸려있었다.

총을 주며 두 번 다시 잃어버리면 그때는 각오하란다.

이유는 아직도 미스터리다.

동료에게 물어보니 교육 중에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여 수습하느라 없던 일로 처리한 것 같다.

 

다음날 아침 오전 교육 출장 준비하고 있는데 선임하사인지 뭔지 중사 계급인데 급하게 무엇을 찾고 있는 듯했다.

우리에게 달려오더니 너희 중에 미장이나 벽돌공 있느냐고 묻는다.

아무 대답이 없으니 기술자 말고 조공 경험자라도 있느냐고 묻길래 어제 일도[소총 분실] 있고 해서 무심결에 손을 들었다.

경험자냐 묻길래 네하고 대답했더니 몇 년 되었냐고 묻는다.

7년 되었다고 대답하니 돌아오는 것은 군홧발로 정강이를 걷어찬다. [일명 조인트 까는 일]

향도에게 뭐라고 말한 후 나에게 소총은 내무반에 두고 오란다.

그 사람을 따라가니 백 평도 더 되어 보이는 막사 건물인데 부대 문관 혼자서 블록을 쌓고 있었다.

그 양반 뒤에는 수십 명의 조공이 있으며 더위에 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나를 보더니 왜 이제 왔느냐 하면서 반가워한다.

한 시간 작업하고 휴식하고 금방 점심식사 군가가 흘러나온다.

동료들이 오전 교육을 마치고 부대 후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문관에게 식사하러 간다고 하니 붙잡는다.

어딜가냐 너는 나하고 사병식당에 가서 식사를 한다.

그러면서 취사병 내무반으로 들어선다.

거기에 가면 네가 불편할 것 같으니 여기서 편하게 먹으란다.

 

너덜너덜한 훈련복이 지저분하기도 하고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 앉아있어라.

내가 밥을 받아올 테니 하며 나간다.

잠시 후 식판 두 개를 들고 들어선다.

배고픈데 어서 먹으란다.

요즘 말로 순삭이다.

문관님 반도 안 먹었는데...

너 배고팠구나 밥 더 갖다 줄까 하고 묻길래 네하고 대답했다.

두 번째 밥그릇도 순삭이다.
어라 이 놈 봐라 하면서 또 묻는다.

네하고 대답한다.

네 번째 식판을 들고 들어온다.

또 묻는다 하지만 이제 배도 부르지만 미안해서 염치가 없는 놈으로 보일까 봐 그만 먹는다고 했다.

그제사 제대로 식사를 마친 문관이 한마디 하면서 식판을 들고나간다.

네가 사람이냐 돼지냐 하면서...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취사병이 20여 명이 넘는데 군복 바지에 상의는 흰색 위생복을 입고 있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면서 취사병들이 밀려 들어온다.

어떤 새끼가 밥을 그렇게 많이 처먹냐 하면서 몰려들어온다.

순식간에 나는 동물원의 원숭이가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3주간의 교육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다.

월요일부터 169 연대로 출근하란다.

평택에서 서정리까지 간 후 경부선 철길을 건너 약 20분을 걸어간다.

오전에 단기 사병이지만 근무지를 배정받는다.

대부분이 지서나 면사무소 무기고 또는 해안기지 및 예비군 중대본부로 받았다.

나는 그대로 169연대 중대본부 경계병으로 [a조] 배치되었다.

1일 근무하고 [24시간] 2일 휴무하고 다시 출근이다.

각조는 12명이지만 선임 2명은 열외이고 10명이 교대로 보초근무를 한다.

한 달 10일 출근하면 20일은 현장에 나가서 돈을 벌 수 있다.

물론 아침에 퇴근이 부대 시간 08시라서 조금 늦지만 사장이 봐준다. [군인이라고]

그래서 중간 초기 선임이 되면서 새벽 06시에 부대 울타리 개구멍으로 조기 퇴근을 했다.

서정리에 와도 아직 시내버스가 없어서 지나가는 화물차에게 부탁한다.

1977년 당시 저를 태워준 화물차 기사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단기 사병은 키도 크고 체격도 우람해서 더 고생을 했습니다.

당시는 가방끈으로 결정되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 역시 신장 175cm 체중 약 75kg 이었으며 다른 동료는 신장 180cm에 체중이 80kg 이상인데...

현역병들은 아주 단신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고 3 재학 중에 입대한 병사도 단신이었고요.

문제는 이들의 컨디션이 나쁘거나 상사에게 당한 후 우리에게 화풀이를 하는 행동입니다.

보초 근무 중에 찾아와서 고개를 들고 위를 보면서 [그래야 내 얼굴뿐] 한마디 합니다.

너 거짓말해서 방위병 되었냐고요.

사실 아버지가 돈봉투 들고 군청 병사계를 만나서 저녁 식사 한 번이면 국졸 처리되어 현역 입영이 안되던 시절이었습니다.

 

두 달 뒤에 부대 유일의 위생병이 용돈 번다고 희망자를 모집하네요.

5명 이상 10명이면 더 좋고 심지어 일반인들도 대상이 됩니다.

일반인은 그 동네로 일요일 출장을 가서 처리합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요 고래 잡는 일입니다.

당시 화폐로 1,000원이면 됩니다.

다음날에 약국에 가서 항생제 [일명 마이신] 거즈 하고 소독약 구입해서 본인이 처리합니다. 

약 10일 정도 지나면 완치되더군요.

딱 한 명이 부작용으로 고름이 생겨서 늦게 까지 고생 좀 하더군요.

그 후 기수별로 신입 사병이 들어오는 대로 짭짤하게 버는데 이 돈이 인사계와 중대장에게도 흘러 들어가더군요.

 

시간이 흘러 늦가을이 되어 서리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내무반에서 대기하는데 차출이라네요.

상병 놈이 무조건 따라오랍니다.

부대 울타리 개구멍을 지나 철조망 바로 옆의 배나무 과수원으로 낮은 포복 합니다.

당시에는 배를 수확해서 곧바로 창고로 가지 않고 과수원에 땅을 파고 임시로 보관하더군요.

천막 같은 것을 들추더니 따블 백을 하나 던져주며 담으라고 하네요.

둘이서 달밤에 가득 담아 어깨에 메고 부대 안으로 복귀했습니다.

잘 익은 배 하나를 주면서 수고했다고 하네요.

 

이듬해 6월에 소집해제 통보를 받았습니다.

정확하게 12개월 1주일이네요.

6월 4일 입소하고 다음 해 6월 12일 날 해제 신고했습니다.

보통 10시 전이면 처리되는데 자꾸만 헛소리를 하면서 심부름을 시키네요.

동기 놈이 하는 말이 야 천 원씩 내자 그래서 돈을 들고 담당 장교[중위 계급]의 책상 서랍을 열고 돈을 넣으니 해제 증서를 주면서 고생했다고 하네요.

부대 밖을 나와 산등성이 소나무 아래에서 우리들만의 전통 행사를 거행했습니다.

왼팔에 붙어있는 노란색 글씨가 보이게 군복 상의를 발로 밟아서 너덜너덜하게 찢어서 나무 가지에 걸어놓는 일입니다.

그러면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는 후임들이 보고 어제 누구누구 선배 고생 끝났구나 할 겁니다.

다음날에 예비군 중대본부를 찾아서 예비군 신고를 합니다.

동원예비군에서 다시 일반 예비군으로 그리고 민방위 대원으로 40살까지 국가에 충성했습니다.

계급은 예비역 일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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