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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성재[城在] 이야기(12) [146]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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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천,성재[城在] 이야기(12) [146]

현덕1 2022. 2. 4. 20:57

최인태의 세상이야기 블로그 입니다

찾아 주신 모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성재[城在]는 치국산 정상부인 옛 성터를 일컫는다.

즉 성이 있었던 자리이며 지금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이곳은 양화 산성 또는 치국 산성이라 부른다.

우리는 치국산이라 불렀으며 어린 시절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기억에는 우물이 있었고 성터 중간에 집이 한채 있었다.

마루에 앉아서 멀리 국사봉과 주내와 대명리 연산 방면을 내려보았다.

당시에는 산에 나무가 없어서 시야가 좋았으며 여기저기 작은 바윗덩이들도 보였다.  

능선길로 내려보면 성밑에서 가재울 넘어가는 작은 고갯길이 보였다.

우물터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물은 작은 계곡을 만들며 가재울 방면으로 흘렀다.

이 작은 물길에는 정말로 가재가 많아서 이것을 잡아서 솥에 넣고 삶으면 붉은 가재가 맛나게 익었다.

 

집 위의 넓은 터에는 우리 동네 임 씨 아저씨가 밭을 일궈 농사를 짓고 있었다.

뽕나무를 심어놔서 우리는 오디를 따먹기도 하고 고구마도 심으셔서 몰래 훔쳐먹기도 하였다.

그런데 오디 하고 고구마는 아무리 조심해서 먹어도 입술 주위가 검게 물들었다.

한 번은 맛있게 먹고 내려오는데 밭주인아저씨가 올라오고 계셨는데 달리 피할 길이 없어 그대로 내려오다가 당시 아이들은 어른을 보면 반사적으로 인사를 한다.

인사를 받은 아저씨가 야단은 못 치고 너희들 또 우리 밭에 들어갔구나 하신다.

 

그 아저씨의 아버지 되시는 임 생원 어르신은 우리 동네 풍수지리 가이시며 의사 선생님이셨다.

자그마한 체구에 항상 한복을 입으시고 저녁이면 우리 집에 꼭 마실을 오셨다.

호롱불 하나 켜 놓고 울 아버지와 함께 봉초 담배를 말아 피우시며 밤늦도록 이야기를 하신다.

우리가 가끔 배탈이 나거나 심한 감기에 걸리면 어르신이 직접 만드신 쌍화탕을 마시거나 침을 한방 맞기도 했다.

 

1960대 초에 작은 숙부님이 돌아가셨는데 생원 어르신께서 묏자리를 봐주셔서 성재 동쪽면에 모셨다.

얼마 후에 적산[敵産] 국유지이었던 이 땅을 청주 경 씨 문중에서 불하받아 자신들의 묘역을 크게 만든 후 상석과 비석을 세웠다.

당시에는 자동차나 중장비가 없어서 다롱고개 고갯 마루까지는 도락꾸[트럭]로 실어와서 내려놓고 갔다.

여기서부터 치국산 정상인 성재까지는 우마차를 이용하여 무거운 돌덩이를 산 정상으로 실어 올렸다.

정상까지 길이 없어서 임시로 길을 만든 후 인근에서 제일 덩치가 큰 황소에게 질마를 건후 볏짚으로 동앗줄을 수십미터 굵게 만든후 이 줄은 인근의 장정들을 불러 모아서 사람들이 소와 함께 끌어올렸다.

수천 년 전에 성재의 양화 산성 축조 시에도 아마도 이 길을 이용했을 것이다.

 

경천에서 주내로 넘어가는 이 고개의 명칭은 여러 가지가 있다.

경천에서 바라볼 때는 동쪽이라서 달이 떠오르는 풍경에 달은 고개 또는 충청도식 발음으로 다롱고개라 불렀다.

고개 아래에 외딴집이 한채 있었는데 이 집에는 앞을 못 보시는 시각장애인 어머니가 계셨다.

어른들은 봉사 또는 소경이 사는 집이라 불렀다.

두 아들은 저하고 비슷한 또래라서 희미한 기억에만 있다.

아주 작은 초가이며 행정구역은 논산군 상월면 석종리이다.

고갯길 바로 아래 작은 우물에서 맑은 물이 솟아 흘러 넘쳤다.

이우물에서 흐르는 물은 문전옥답을 적셔준다.

겨울철이면 썰매를 들고 다롱고개 넘기 전의 방죽이나 고개 넘어 논에서도 타고 조금 더 내려가면 주내 서쪽 방면의 조금 넓은 방죽이 썰매 타기 아주 좋은 장소였다.

하지만 서로 다른 동네라는 이유로 아이들끼리 싸움이 종종 발생했다.

우리가 지고 나면 다음 장날 이 동네 아이들은 경천 장구경에 함부로 오지 못했던 걸로 기억한다.

 

공주군과 논산군의 경계이지만 중학교는 경천중학교를 장마당도 경천장을 이용하였다.

이 고개는 상월면 석종리, 대명리 분들의 서울 가는 길목이기도 하였다.

버스를 놓치면 걸어서 넘고 장날이면 동네 사람들이 행렬을 이루어 고개를 넘나들었다

비포장 도로에 버스가 하루 몇 차례 운행되었지만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지금은 다리가 건설되고 도로가 포장되었지만 당시에는 장마가 나거나 큰비만 내려도 버스가 냇가 한복판에 빠져서 오도 가도 못할 때가 많았다.

장비가 없던 시절이라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밀거나 끌어당겨서 버스를 꺼내 주기도 하였다.

 

가재울 마을에는 백일헌[白日軒] 이삼 장군[李森 將軍]의 종택이 있다.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이바지함에 따라 영조가 내린 하사금으로 지은 건물로 원형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지금은 도로가 개설되어 편리하지만 옛날에는 걸어서 가야 하는 길이라서 버스가 다니는 다롱고갯길이 아니고 성밑에서 개명당 작은 소나무 숲을 지나 곧바로 산으로 올라선다.

그러니까 걸어가는 지름길이었지만 지금은 이용하지 않아서 그 흔적조차 찾기도 힘들 것 같다.

 

성터가 있어서 성재라 부르며 치국산을 성재산으로 부르기도 한다.

정상부는 행정구역상 상월면 석종리에 해당한다.

산아래 마을에서 올려보면 성곽의 돌이 허물어진 것이 확연하게 구분이 되어 돌무더기가 보였는데.

서쪽면과 북면 쪽의 돌무더기가 더 많아 보였다.

동쪽면은 돌보다 흙 즉 토성의 분위기로 보였다.

1990년 중반까지 이곳에 벌초하러 올라왔다.

그 후 이장하여 아직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다.

 

겨울철에는 나무하러 올라가고 칡뿌리 캐러도 가보았으며 봄철에는 띠풀의 이삭인 삘기를 뽑으러 올라 다녔다.

성밑 마을 바로 위로 오르면 작은 바위에 동굴이 있었는데 이곳에 무슨 짐승이 들어갔는지 확인한다고 소나무 가지를 꺾어 쌓아 놓고 불을 질렀다.

잠시 후에 동네 어른들이 달려오시고 우리들은 한동안 훈계를 듣고 야단을 맞았다.

 

성을 완공하고 한 번도 싸워보지 못하고 허물어져서 치국산이라고.

백제 의자왕의 최후를 보았다 해서 치국산이라 하고.

기타 등등의 이유로 치국산이라 했다는데.

나는 역사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고 본인의 기억에만 의존한 것임을 밝혀둔다.

지난 몇 차례의 글에도 치국산이나 성재 이야기를 언급한 바 있다.

 

들판 건너의 노성산성을 마주 보고 있으며 경천 역참과 마찬가지로 호남의 소식이나 긴급한 보고를 봉수로 알렸던 곳이기도 하다.

참고로 성재에는 봉수대나 봉수의 흔적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직접 확인은 못했다.

북으로는 쇠산 [쇠봉]이 감바위산과 이어져서 계룡 저수지와 맞닿는다.

남으로는 괘등산을 다롱고개와 마주한다.

경천 저수지는 쇠산과 치국산의 작은 골짜기[쳉면]를 가로막아 건설된 저수지이다.

1960대 중반에 건설되어 우리 동네 밭이 논으로 바뀌어 쌀농사를 도왔으며 성밑 마을 안으로 물이 흘러 빨래터도 만들어졌으며 무더위가 한창일 때는 우리들은 물길에서 멱을 감고 놀았다.

 

계룡산 연천봉에서 내려보면 작은 동산처럼 보여도 그 기세는 여느산 못지않다고 생각한다.

나의 유년 시절에 꿈과 흔적들이 깃들어 있으며 그 시절 함께 뛰어놀았던 동무들 이곳 성재를 잊지 않고 잘들 계신지 여기에서 묻고 싶다.

산 중턱에서 신나게 뛰어놀다 보면 어느새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질 때 어머니들의 합창 아닌 합창소리가 들려온다.

아무개 아무개야 빨리 오너라.

이것은 저녁밥 먹으라고 부르는 것도 되지만 빨리 와서 물깃고 애기도 보고 청소도 하며 집안의 어질러진 모든 것 치우라고 부르는 우리 어머니들의 따스하신 목소리였다.

이제 다시는 아니 영원히 들을 수가 없지만.....

 

충청도 특유의 무관심과 애향심은 오늘도 어김없이 부정적으로 들어 맞았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충청도에는 대통령이 나오지 못했다.

장담 컨데 한동안에 충청도 대통령은 안 나올 것이다 아니 못 나올 것이다.

연천봉 바위에 새겨진 방백 마각 구혹화 생의 글씨가 왜 거기에 그렇게 쓰여있는가?

계룡면 출신의 출향인이기에 두마면의 계룡시가 왜 자꾸 눈에 거슬리는지 나는 오늘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