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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내 고향 경천의 맛 2(10). [134] 본문
최인태의 세상이야기 블로그입니다.
방문해주신 모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어린 시절 태어나고 17년을 살아온 내 고향 공주군 계룡면 경천리이다.
고향 이야기는 시리즈로 이미 몇 편의 글이 있지만 그 시절 고향의 맛이 잊히기에 다시 한번 적어보려 한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서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음식의 맛을 알지 못하니 표현에도 한계가 있을 것이다.
고향의 맛을 저 혼자만의 객관적으로 써야 하기에 오해의 소지나 제가 잘못 알고 있는 내용도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이것은 무슨 보고서도 아니고 역사적 의미 또한 전혀 관계도 없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저 혼자만의 생각이고 맛 표현일 뿐이다.
또한 그 시절의 맛을 함께 느끼시거나 알고 계시다면 다행일 것이다.
전후 세대의 가장 가슴 아픈 고갯길을 걸어 넘어서 아니 살아남아서 오늘날의 풍성해진 음식에 오히려 설움이 밀려오기도 한다.
더 잘 먹고 많이 먹고 먹은 만큼 힘들게 빼내야 하는 고통이 심란해지기도 한다.
그 시절에 돌아가신 영령들께 죄송함과 미안한 마음을 가슴에 담아 사죄드리고 싶다.
동네가 워낙 크고 넓어서 한해에 여러 집에서 크고 작은 잔치가 열린다.
가난한 시절에 잔치라는 말 만들어도 행복해진다.
더구나 나이 어린 우리들은 어디 가도 대접도 푸대접이지만 그래도 기다려진다.
각설이 타령의 한가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어느 볕 좋은 날 갈 곳 없는 각설이 한 사람이 담벼락 아래 앉아서 중얼 중얼하고있는데.
자기 나름으로 적어놓은 수첩인지 종이 쪼가리를 들춰보며 읽는데.
내일은 건넛마을 코쟁이 영감 환갑날이고 글피는 재넘어 김영감 제삿날이고 그다음 날은 큰골 마을 박영감 아들 장가가는 날인데 이날은 내가 땡잡은 날이여.
그런데 오늘은 뭔 날인가 이런 이런 오늘은 맹탕이네.
그러나 각설이도 아닌 우리도 별 볼 일은 없지만 어찌 되었던 기대가 크다.
잔칫집 뒷마당에서 바가지에 말아주는 국수 한 그릇에 감동하지만 아직도 뱃속은 많이 부족하다.
국수를 말고 계신 어머니를 바라보지만 울 엄마는 계모처럼 흘끗 쳐다보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어서 가~
그런데 말입니다.
친구 어머니는 자기 아들만 몰래 불러서 앞치마에 음식을 가득 담아내 오신다.
설날 아침이면 성밑 마을 한집도 안 빼고 세배를 다닌다.
당시에는 세뱃돈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아이들한테 음식을 내어주는 집도 없었다.
그런데 딱 한집 갱변 둑에 살고 계신 임 씨 어르신 댁만 달랐다.
세배를 마치면 다식을 몇 개씩 손에 쥐어주셨다.
이것이 얼마나 맛이 있던지 아직도 꿈속에 나타난다.
어느 해에는 머리를 썼다.
야 우리 이렇게 해보자 다른 집은 국물도 없으니 필요 없고 임 씨 어르신 댁에 다시 세배를 가자고 아이디어를 냈지만 안된다 들키면 혼난다 또는 양심상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등등...
그러자 내가 이렇게 말했다 서로 비슷한 사람끼리 옷을 바꿔 입고 가보자 해서 세명이 도전했다.
성공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는 들어가지 않았다.
어르신께서 알면서도 웃으며 주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아마도 1965년도 초여름으로 기억된다.
당시 무슨 일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계절로 봐서는 긴 가뭄에 기우제를 모시는 것으로 생각난다.
기우제 장소는 평지가 아닌 치국산 정상인 치국 산성 안에 동네 사람들이 전부 모인 것 같았다.
당시에는 산에 나무들이 자랄 수 없어 동서남북 어디든 20십 리 이상 지나가는 개도 보일 정도였다.
큰 솥을 걸어놓고 바가지 그릇에 돼지비계가 한점 들어있는 벌건 국물을 담아 주기에 맛있게 받아먹었지만 그날 저녁부터 화장실에 그대로 반납했다.
무거운 짐들을 지게 지고 머리에 이고 험한 비탈길을 힘들게 오르셨을 것이다.
하늘에 비는 정성은 힘들고 어렵게 해야 통하는 법이라서 그러하셨는지 모른다.
아메리칸 인디언은 기우제를 지내면 그다음 날에 반드시 비가 내린다고 한다.
이유는 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쉬지 않고 지내기 때문이다.
이쑤시개로 코끼를 죽이는 방법은 죽을 때까지 찌르는 것이란다...
그런 이유로 그렇게 힘든 장소를 선택하셨나 보다.
지금도 고춧가루 묻은 돼지비계 덩어리를 먹으려면 그때의 기억이 선명해진다.
경천 장날은 장구경도 푸짐하지만 시장 한편의 먹거리 파는 곳은 냄새부터 진동한다.
당시의 주방은 밖에 가마솥 걸고 장작을 태운다.
이때 솥뚜껑을 열면 그 냄새에 취하고 음식의 향에 취한다.
불행하게도 시장 식당에서는 한 그릇의 음식도 먹어 본 적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더 가슴 아프게 밀려온다.
장터에서 우리 집까지 너무 가까운 것이 문제였다.
십리 먼길을 걸어온 아이들은 어찌 되었던 밥은 먹어야 했다.
밥때 되었지만 그 먼길을 가려면 무엇이든 먹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옆집 아저씨라도 마주치면 아무개야 이리 오너라 밥 먹자 하고 잡아끌었을 텐데.
우리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들은 열 번을 마주쳐도 반응이 없다.
집이 근처이니 배고프면 집에 가면 될 것이고 아무 때나 찾아가서 먹고 다시 장마당에 오면 되기 때문이다.
장마당의 식당 메뉴는 아쉽게도 기억나는 것이 별로 없다.
다만 냄새로 짐작하거나 광목천에 몇 글자 써놓은 메뉴만 기억날 뿐이다.
보통은 국밥이 제일 많았고, 국수 또는 짜장면 글씨도 생각난다.
한여름날의 장마당은 과일 냄새가 더 좋았다.
당시에는 거의 유기농에 무농약 농산물이었기에 향이 더욱 짙게 우러났을 것이다.
참외 냄새. 토마토 냄새, 복숭아와 자두 살구 등도 특유의 냄새를 자랑했다.
냄새 없는 수박은 색깔이 생각나고 사과의 붉은색 또한 잊히지 않는다.
장터 입구의 백 씨 아저씨네 기름 방앗간에는 향긋한 냄새가 아직도 콧가에 맴돈다.
들기름과 참기름을 하루 종일 짜낸다.
바로 옆에는 뻥튀기 아저씨의 고함소리 후에는 더 고소한 냄새가 바람을 타고 장마당으로 흩어진다.
깨를 볶을 때는 나무를 태우기에 나무 타는 냄새까지도 고소했다.
볶아진 깨를 통에 쏟아붓고 뚜껑을 덮은 다음 두 아들이 기다란 쇠막대를 구멍에 넣고 연자방아 돌리듯 번갈아 돌아가며 당겨준다.
몇 바퀴를 돌다 보면 기름 방울이 흐르기 시작하면 고소한 냄새가 장마당으로 흩어져 나간다.
깻묵이 나오면 어떤 날은 잘게 부순다.
이때 한 덩어리 얻으면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아껴먹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게 자랑하고 약 올리기도 한다.
깻묵 쪼가리라도 한번 만지면 양손바닥에는 기름기가 번지르하면서 그 냄새는 며칠간 유효하다.
초여름날 또래들과 산과 들에서 개구리 사냥을 한다.
참개구리 한 마리 잡아서 잔인하게 허리 부분을 돌로 내리쳐서 끊어버린다.
다리만 남겨서 불에 구운 후 굵은소금으로 간을 맞춰가면서 먹는다.
아이들 중에 한 명이 집에 있는 귀한 소금 항아리에서 한 움큼 집어 나온다.
아마도 돌아가면서 교대로 그랬던 같다.
지금은 절대로 그런 일은 못하겠다.
당시에는 죄책감 같은 것은 없었고 다만 고기를 못 었기에 돼지고기를 대신했던 것이다.
당시 내가 철부지 행동으로 유명을 달리한 개구리들에게 용서를 빌며 명복을 빌어준다.
다시 밭으로 내려오면 밀, 보리, 콩서리를 단행한다.
누구네 밭인 줄 알지만 한 움큼씩 뽑아 멀리 산속으로 들어간다.
바짝 마른 나뭇가지를 태우면 연기가 거의 안 난다.
손바닥과 입술 아니 얼굴 전체가 시커먼스가 되어 서로의 얼굴을 보며 큰 웃음으로 하루해를 보냈다.
가을이 오면 메뚜기를 잡고 웅덩이에서는 물방개[쌀 방게 포함] 잡아서 가마솥을 달군후 뚜껑을 열고 집어넣는다.
잠시 후 아주 맛있게 튀겨진 아니 익어버린 맛 좋은 양질의 단백질을 맛본다.
영철이 할아버지 환갑 잔칫날 이야기이다.
마당 한가운데 큰 치알이 쳐지고 마당에는 몇 장의 멍석이 깔린다.
마루 가까운 자리에 큰 상을 여러 개 겹쳐놓은 후 산해진미가 쌓인다.
자손들이 돌아가며 잔을 올리며 큰 절을 올린다.
그런데 남의 할아버지 환갑이지만 이 시간이 엄청나게 지루하다.
빨리 끝나야 음식을 먹기 때문이다.
물론 환갑잔치이지만 애들을 위한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적당히 눈치껏 여기저기서 얻어먹어야 한다.
숫기 없고 넉살 좋은 아이는 배부르지만 절대 그렇지 못한 나는 언제나 배고팠다.
여기저기 기웃기웃하다가 그 집이 토광을 보았다.
토광은 원래 송판 떼기 나무토막으로 막아놓지만 그날만은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
며칠 전부터 준비한 음식을 모두 이곳에 쌓아놓고 손님이 오는 대로 담아내 주는 과방이라 불리는 곳이다.
엄청난 양의 산해진미 속에 두 아저씨가 바쁘다.
한참을 침을 흘리며 쳐다본 나는 결심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동네 잔칫집마다 과방 보는 일을 할 것이라고.
아무래도 맛있는 음식을 담다 보면 안 먹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많이 먹어도 누가 보는 사람도 없고 뭐라 할 사람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서 알아보니 과방 보는 사람의 역할이 욕먹는 자리라는 것을 알았다.
음식의 양은 정해져 있는데 그 집에 찾아오는 손님의 숫자에 맞춰 음식이 줄어야 하는데.
맛있는 음식이 일찍 모자라거나 어느 한 가지만 담다 보면 나중에 모자라게 되어 난감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집의 사돈어른이 거리가 멀어 늦게 도착했는데 맛있는 떡갈비가 남아 있지 않을 경우라든가 그 집 안 특유의 자랑거리 음식 또한 없는 경우는 사돈에 결례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방 보는 사람은 그 집의 젓가락 숟가락 숫자까지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손님 대비 음식의 비율을 정확하게 맞추는 일은 귀신도 못할 것이다.
경천에는 고물상이 두 곳이 있었다.
내가 살던 성밑 마을에는 직접 엿을 고아서 팔았다.
엿을 만드는 일은 이삼일 정도 소요되는 것 같다.
일단 대형 솥에 물을 붓고 엿의 재료를 넣은 다음 오랜 시간 불을 태운다.
내용물이 졸아들기 시작하면 불의 양도 줄이기 시작한다.
엿의 재료는 몇 가지인데 주인이 아니고 옆에서 구경해서 기억이 없다.
솥에서 엿이 완성되면 소위 말하는 갱엿이 나온다.
물렁 물렁하면 아주 찰지다.
작은 양은 쟁반 같은 그릇에 원형으로 갱엿으로 만들고 나머지는 방안에 만들어진 나무 고리에 걸쳐지면서 잡아당긴다.
수도 없이 잡아당기도 걸치고 다시 잡아당기고 여름철에는 땀방울이 튀고 겨울철에는 손바닥에 퉤퉤 소리도 들린다.
밤새워 두세 분이 당기면 어느새 엿은 흰색으로 변하며 공기방울이 스며든다.
우리는 옆에서 구경만 하고 몇 가지 잔심부름해주면 엿 만들다 떨어진 부스러기를 얻어먹는다.
이때 먹는 엿은 세상 어디에는 없는 꿀맛이었다.
이유는 원초적인 재료이며 수공으로 만들었으며 생산 즉시 현장에서 맛보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된다.
지난번에 적었던 각종 서리[도둑질]로 먹었던 모든 맛이 포함된다.
내가 10년만 더 고향 살았으면 이야기는 풍성 해질 것인데 아쉽다.
하늘을 나는 새도 죽을 때는 고향으로 향한다고 한다.
이제 나이 들어가니 더욱 생각나는 것은 먹거리이며 고향의 맛일 것이다.
그중에 더 생각나는 것은 어머니 손맛이며 동네 아주머니의 손맛일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찾아갈 수도 먹을 수도 없는 맛이기에 더욱 그리워진다.
지금 찾아가도 절대 그 맛은 없을 것이기에 더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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