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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그 시절 사방공사 [118] 본문
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블로그입니다.
찾아 주신 모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1969년 봄으로 기억됩니다.
계룡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주변 산과 계룡산 일원에 나무를 심고 무너진 곳을 보수하는 이른바 사방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당시에는 새마을 운동전이라 인력은 남아돌았지만 집집마다 농사일이 바쁘기 때문에 어린아이도 동참합니다.
본인은 당시 16살이였습니다.
갑사계곡 일원의 나무 식재 작업은 당시 부역으로 시행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구마다 1명은 무조건 참여해야 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모두가 함께했습니다.
도시락 하나 들고 20리 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물론 삽이나 괭이는 필수였고요.
우리 집은 제가 나갔는데 낙엽송 묘목을 지난밤에 트럭으로 싣고 와서 논 속의 물에 담가놓았네요.
나무의 개수는 모르겠지만 뿌리에 흙도 달려있고 밤새 물에 담가 놓아서 무거웠습니다.
한 묶음씩 들고 산에 오릅니다.
벌거숭이 민둥산에 아래 위로 길게 못줄처럼 늘어놓으면 신호에 맞춰 구덩이 파고 한 그루씩 식재합니다.
당연 일당도 없고 보상은 전무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약 25년 후쯤에 갑사를 찾았습니다.
길을 막고 입장요금을 받고 있더라고요.
국립공원입장료라나 뭐라나~
내가 심은 나무가 아름드리가 되어 내려보고 있더라고요.
참말로 땡전 한 닢 안 받고 죽어라 고생했는데 들어가려면 돈을 내라.
물론 입장요금 내고 들어갔습니다.
어른들 틈에서 하루 종일 오르락내리락 다리 아픈데 다시 20리 길을 걸어야 집에 갈 수가 있습니다.
지금은 국립공원 입장요금은 없으나 사찰[문화재 관람료]에서 돈을 걷고 있네요.
이듬해에는 계룡산 주변의 작은 산에서 사방공사를 시작합니다.
이곳은 일당을 지급해주네요.
애들은 100원 어른은 250원 정도 주었을 겁니다.
저도 당연 100원짜리였습니다.
아침에 지게를 지고 가서 물에 담가 놓은 묘목[낙엽송, 오리나무, 아까시나무]을 약 3묶음 정도를 지게에 지고 산을 올랐습니다.
한참을 씩씩거리고 오르면 어른들은 그냥 앉아서 담배만 피고 거의 농땡이 수준입니다.
억울해서 힘든 일은 우리가 하는데 왜 돈은 적게 주느냐고 십장[반장] 따졌습니다.
그랬더니 너는 애들이라서 그렇다네요.
당시는 모든 산들이 민둥산이었습니다.
여름철에 비가 내리면 벌거숭이 산 한쪽면의 흙이 모두 떠내려가서 기다란 구덩이가 생겨납니다.
이때 맨 위에서부터 계단식 [일본말로 가이당]으로 만든 후 평평해진 곳에 나무를 식재합니다.
어른들은 계단이란 말은 한마디 하지 않고 무조건 가이당이라 하더군요.
그 외 알아듣지 못하는 일본말을 많이도 하더군요.
얼마 후 임금을 준다고 어디로 모이라 해서 갔더니 지프차를 타고 온 사람이 돈다발을 내려놓더군요.
저도 하루 100원씩 해서 얼마간을 받아왔습니다.
아마도 생애 최초로 번 돈이었습니다.
어머니께 모두 드렸더니 100원짜리 한 장을 주시네요.
이 돈을 들고 경천 장터로 가서 감빵[건빵]을 한 봉지 구입했습니다.
집으로 와서 형제 들고 맛있게 나누어 먹었는데 아주 꿀맛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부역이 많았습니다.
완전 강제였지요.
집집마다 강제로 할당이 됩니다.
부역이 면제되는 집이 있었는데 아무리 따져봐도 우리 집은 전혀 해당이 되지 않더군요.
특히 23번 국도가 당시는 비포장인데 [ 논산에서 공주 구간] 자갈이 없으면 자동차가 빠지기 때문에 일 년에 한두 번 자갈을 도로 옆에 일정 높이로 쌓아놓아야 합니다.
이때 감독관이 와서 자로 잰 후 합격이라 해야 끝납니다.
우리는 하마루에서 금띠 구간 사이였는데 세상에 제일 귀한 것이 자갈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잣집은 소달구지로 냇가에서 자갈을 싣고 와서 한 번에 끝내고 돌아가네요.
우리 집은저와 어린 동생들이 지게로 이고 지고 날랐는데 어느해는 며칠간 하였습니다.
자갈이 하도 귀해서 망치를 들고와서 조금 큰 돌은 망치 내려 쳐서 작은 돌로 즉 자갈을 만들어서 쌓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집은 왜 면제가 안되어 이 고생을 하는가?
생각해보니 뭣도 백도 없더라고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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