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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내 고향 경천 바로 알기(6) [107] 본문
최인태의 세상이야기 블로그입니다.
방문해주신 모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고향 이야기 시리즈로 이어집니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에 이렇게 적혀있답니다.
우물 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고...
그래서 우물쭈물하지 않으려 미리 대비합니다.
경천인 [敬天人]으로 태어난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자부심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동향의 선후배님들에게 누[累]가 되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습니다.
애향심은 고향을 떠난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고이 간직되어있을 겁니다.
그 시절의 고향 모습이 아니라고 실망하지 마시고 우리의 어린 시절로 기억하세요.
경천리 1,2,3구는 당시에 인구수도 많았으며 넓은 면적에 장터와 상가[가겟집] 그리고 모든 편의시설이 잘되어있었지요.
면소재지, 읍소재지 부럽지 않은 곳이었는데....
지금쯤이면 경천읍이나 경천 시로 승격되어있어야 마땅한 줄 생각됩니다.
23번 국도의 개설 당시 계룡에서나 상월에서 옛길[삼남대로 길]을 놔두고 지금의 도로를 만들었는지 의아합니다.
경북 봉화군의 춘양면처럼 기찻길을 일부러 구부려서 자기 동네를 지나도록 고집부리는 인물이 없던 걸까요? [억지춘양 이야기]
그랬더라면 경천리의 모습은 180도 달라져있을 겁니다.
다른 이유나 핑계는 이제는 소용없는 일이네요.
경천중학교는 1950년 개교하였습니다.
70년 전에 교육의 장을 이 땅에 만들고 인재를 키웠습니다.
경천 교회 역시 11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합니다.
경천초등학교는 해방되던 해 개교하여 한때는 재학생이 1,000명이 넘어서 상성초등학교로 분교 되기도 하였지요.
장터의 규모는 충청지역의 톱 10에 들 정도로 규모가 컸답니다.
양조장과 방앗간 2곳이 그 외 모든 시설들이 집중되어있었답니다.
하마루에서, 황새울 방향에서. 양화리에서, 다롱고개넘어 석종리, 대명리에서, 용머리 방향에서, 상보 안에서 이어지는 6 거리가 있는 동네입니다.
경천리의 옛 사진입니다.
이곳 위치가 중학교 앞에서 장터로 내려서는 길목일 겁니다.
멀리 보이는 산이 괘등산으로 용머리와 등정골 뒷산으로 보입니다.
괘등 산은 등정골의 뒷산을 말하며 등잔을 걸어놓은 형국이라서 이를 한자로 풀면 [掛燈山]이 됩니다.
성밑에서 주내 넘어가는 달은 [다롱] 고개 우측산입니다.
조금 내려가면 방앗간[정미소]일 겁니다.
중앙사진관으로 보이며 초등학교 졸업앨범 사진을 촬영했던 곳으로 기억됩니다.
위의 사진과는 조금의 시차가 있습니다.
현재 작업하는 자리는 하마루에서 경천 들어오는 길목 다리 건너기 전일 겁니다.
왼쪽은 생평 [상평] 마을이고요.
멀리 능선은 계룡산 줄기이며 국사봉이 보이네요.
가운데 산은 성재가 있는 치국산입니다.
사진은 충청 메시지에서 퍼왔습니다.
경천의 옛 모습을 담은 사진이 너무 없어 아쉽네요.
경천역참의 흔적을 찾을 길은 없지만 어딘가에 묻혀있을 겁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 설명되어있습니다.
역참에는 기마[騎馬] 7 필[匹], 복마[卜馬] 8 필[匹], 노 [奴] 37명, 비[婢] 18명의 규모였다고 한다.
경천에는 남북으로 이문[里門]이 건립되어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지고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경천 교회 종탑 바로 옆의 이문은 본인의 기억에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기둥이 네 개이며 기와를 얹은 단조로운 건물이었다.
이문의 징표는 삼남대로를 일컬으며 어사길이었음을 증명한다고 할 수가 있겠다.
또한 경천은 지역민의 단합이 아주 우수하였으며 부역이라든가 재난 시에 모두가 자신의 일처럼 발 벗고 나서 서로 도우며 헤처 나갔다.
경천 의용 소방대의 활약은 아주 눈 시게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수동펌프를 이용하여 화재를 진압했는데.
양쪽에서 2명 또는 4명이서 그러니까 4명이나 8명이 동시에 손잡이를 아래 위로 눌러서 물을 분수호스 보내 화재를 진압하였으니 얼마나 힘든 노동이 아니던가?
바퀴는 타이어가 아닌 철바퀴로 기억된다.
본인의 기억에 화재 진압 현장을 몇 번 보았다.
또한 소방서 건물의 전망대에는 수동 사이렌을 설치해서 화재 소식을 알렸고 그 외 긴급한 일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1960년대 중반에 우물을 파던 최 씨 아저씨가 흙더미에 매몰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소방대의 사이렌 소리를 모두 달려오셔서 밤샘 작업으로 무사히 구조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경천 의용소방대 논산 관촉사 야유회 기념사진입니다
단기 4288년
서기는 1955년입니다.
사진상의 번호는 제가 임의로 새겨 넣었습니다.
11번은 저의 선친이시고요. 7번은 저의 작은 숙부님이십니다.
1번은 성밑에 조복수 어르신 같고요. 38번은 흥연이 부친 같습니다.
그 외 몇 분은 알아보겠는데요.
혹시라도 이사진을 보시는 동향인은 자신이 알아볼 수 있는 번호는 함자와 함께 댓글 부탁드립니다.
저분들은 우리 모두의 어른이자 아버지들이십니다.
경천리는 오랜 역사를 간직한 마을이며 산자수려한 아름다운 고장입니다.
꿈엔들 잊을 수 없는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이지요.
몸은 떠나 있지만 고향 그리는 애향심은 잊으면 안 됩니다.
제 기억과 몇 번의 검색으로 적어보았습니다.
더 많은 노력과 공부로 경천을 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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