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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경천의 옛 지명(7) [108] 본문

오늘의 이야기.

내 고향 경천의 옛 지명(7) [108]

현덕1 2021. 5. 31. 20:45

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블로그입니다.

찾아 주신 모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경천 이야기는 시리즈로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우리 기억에서 멀어져 가는 경천의 옛 지명을 적어보려 합니다.

어디에도 검색이 되지 않아서 저의 작은 기억에만 의존해보려 합니다.

경천 1,2,3구 모두 해당이 됩니다만 제가 놓치고 있는 부분은 동향인들께서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경천리는 쇠봉[쇠산] 그리고 치국산과 괘등산이 나란히 내려 보는 마을입니다.

 

언제 들어도 다정한 그 이름 들입니다.

장터 기준해서 큰 길가를 주막거리라 불렀으리라 생각합니다.

주막거리라는 명칭은 전국의 크고 작은 마을에는 꼭있는 이름입니다.

주막거리 주변은 대포집부터 온갖 가게들이 많이 있었지요.

 

돌징이 [돌우물] 돌에서 물이 솟는다 해서 돌 [井]우물정자인데  돌덩이가 충청도식 발음으로 돌징이로 변음이 된 것 같습니다.

 

양화리 들어가는 길목인 물레방아 근처를 쳉면이라고 불렀답니다.

쳉면 물레방앗간에서 물 떨어지는 곳에서 피라미도 잡고 놀았는데요.

 

치국산 정상부를 성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센 발음으로 성째 올라가자 하며 놀았습니다.

성재에는 우물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흔적이 있으며 물이 조금 고여있다 합니다.

집이 한채 있었으며 위에 평평한 곳은 밭이 있었습니다.

어느 해에는 고구마를 심어서 몰래 캐먹고 내려오는데 밭주인 [성밑 임 씨 아저씨]이 올라오면서 우리들 입술을 보더니 너희들 고구마 캐먹었지하고 묻길래 그냥 도망갔습니다.

그 후에는 뽕나무 밭인데 오디 따먹었는데 역시 입술에 자국이 남아서 가재울 방향으로 내려왔습니다.

밭주인 만날까 봐서요.

 

1960대 초반 어느 해 가뭄이 들어서 성재에서 기우제 지낸다고 올라가 보았습니다.

동네 어른들이 지게에 먹거리와 제물을 지고 올라오셨더라고요.

끝나고 돼지가 물 건너간 국물 한 바가지 얻어먹고 내려온 기억이 선합니다.

 

그 아랫마을이 성밑인데 우리식으로 성미티 또는 셍미티라고 불렀습니다. 한자로는 [城本]이라고 했습니다.

 

그 옆에는 개명당이 있었고요.

개명당은 아주 작은 초미니 동산이며 작은 방죽이 있었습니다.

바로 위에 논의 상단에는 물이 솟아 올라 동네 아주머니들의 빨래터가 있었고요.

겨울철에도 잘 얼지 않아서 불 피워 놓고 빨래하시더라고요.

우리는 방죽에서 썰매 타고 놀았고요.

 

지금의 경천교 다리 근처를 엉턱 꺼리라고 불렀습니다.

장마철이면 용두천의 넓이가 춤을 추었거든요.

지금이야 용두천이지 당시에는 충청도 발음으로 갱변으로 불렀답니다.

친구야 갱변으로 멱감으러 가자.

다리가 없던 시절 이곳에서 버스가 자주 물 빠져서 고생 좀 했지요.

냇물 건너면서 작은 오르막을 엉턱 꺼리라 했습니다.

 

그 위에는 석종리, 가재울 넘어가는 다롱고개 또는 달은 고개가 있습니다.

고개에도 작은 방죽이 있어 겨울철에는 그곳에서 썰매도 타고 여름철에는 마름과 우렁이도 잡았습니다.

고개 넘어 외딴집에는 시각장애인이신 할머니가 두 아들과 살았습니다.

 

아래로 내려오면 용머리입니다.

청주 경씨 분들이 많이 살았었지요.

 

용머리 사는 몇 년 선배님으로 생각나네요.

성함이 경*수인데 이선배님 덕에 평생 담배 한 개비 피우지 안 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이유는~

국민학교 4학년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동네 아이들 몇 명이서 나무한다고 망태기 메고 낫 한 자루 들고 양지바른 산소에서 놀고 있는데...

이때 용머리 선배님이 올라오더라고요.

봉초 담배를 크게 만들어서 우리들을 한 줄로 세우더니 강제로 입에 대고 피우라고 하는데.

거부하면 주먹이 날아오고요.

제 차례가 되어 입에 담배를 물리려 하길래 주먹으로 내려치며 선배한테 욕을 하면서 달려내려 왔습니다.

집에 와서 숨어있는데 친구들이 망태 기하고 낫을 가지고 와서 하는 말이...

너 욕하고 달아나서 다음에 만나면 죽여버린데...

그다음 날부터 장구경도 못 가고 얼음판에 썰매타러도 못가고 혼자 나무하러도 못 가고요.

그렇게 그해 겨울을 꼼짝 못 하고 숨어 지냈답니다.

그 사건 후로 담배는 구경만 하기로 했답니다.

선배님 잘 지내시지요?

 

용머리 다음이 등정골입니다.

괘등산의 이름에 걸맞은 등잔걸이 형태인데 호칭은 등정골[등잔 골]입니다.

여기 등정골은 전봉준의 농민군들에 훈련장이기도 하였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요]

등정골에서 수랭이 까지는 엄청난 참나무 군락지였습니다.

본인의 기억에 가을에 상수리 주으러 고개 너머로 다녀오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들판으로 나오면 빈재미 벌판이 나옵니다.

일명 경천 평야로 부르기도 합니다.

바둑판처럼 정리되어서 아주 기름진 옥토랍니다.

 

그 끝에는 들말이라는 거대한 노거수[느티나무]가 있는 작은 동네가 있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에 경지정리 사업에 사라진 동네일 겁니다.

들말에서 상보 안 중간지점에 고푸 샘이라는 물웅덩이가 있었습니다.

경천이 고향인 남자들은 이곳을 모르면 간첩일 겁니다.

웅덩이 바닥과 벽면이 돌로 되어있어서 멱감고 물놀이 하기에 아주 좋았던 곳입니다.

선배님들은 다이빙도 하고 잠수해서 물속을 한 바퀴 돌기도 하고요.

냇물 바로 옆의 웅덩이는 철사 방죽이라 불렀고요

그 옆에는 사철 마르지 않는 큰 웅덩이 기계 샘이라고 불렀던 기억이 나네요.

고푸 샘과 철사 방죽은 가뭄에는 바닥이 보였습니다.

 

위로 올라오면 상보 안 마을입니다.

사과나무 과수원이 있었으며 이곳에도 물건너에 물레방앗간이 있었습니다.

과수원집 아들 동석이도 보고 싶네요.

양어장도 기억이 떠오르네요.

 

다시 상평[上平] 마을입니다.

충청도식으로 생평이라부르기도 합니다.

위에 있는 너른 평야라서 그렇게 불렀나 봅니다.

 

금대리 황새울 올라가는 어사길 옆의 동네는 구비안이라고 불렀고요.

구비안에서 금대리 삽작골 넘어가는 아주 작은 고개는 삼신 당고개로 알고 있습니다.

기억이 희미해서 맞는지 모르겠네요.

 

여기까지가 제 기억의 한계선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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