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
Tags
- 괴산청천벌초대행 괴산벌초대행
- 괴산청천벌초대행.괴산제초대행
- 청천벌초대행.
- L
- 공주군 계룡면 경천리.경천중학교.경천저수지.
- T
- `
- 청천벌초대행
-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경천리.성밑마을.
- 충북괴산벌초대행
- 동
- ㅡ
- 청천면지경리 지경리 아랫지경 깃골 주막거리
- 괴산청천벌초대행
- d
- 벌초
- 벌초대행
- 다음
- ㄱ
- 괴산청천벌대행
- 괴산제초작업
- 농장 공장제초작업
- 괴산제초대행
- 제초.
- M
- 괴산벌초대행
- ㅣ
- 괴산청천제초대행
- 야
- 괴산벌초대행.
Archives
- Today
- Total
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내 고향 경천 이야기(2) [94] 본문
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블로그입니다.
찾아 주신 모든분 들께 감사드립니다.
정확하게 51년 전 4월 초에 고향을 떠났다.
17년간 정들었던 탯자리를 홀로 남겨두고 넓은 세상의 힘찬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성밑에서 화마루까지 걸어간후 버스를 타고 비포장길을 달렸다.
차령고개를 넘어 행정리 삼거리부터는 1번 국도여서 포장길이다.
경기도 평택 버스 터미날에 내려 역을 지나 육교를 건너 변두리 주택에 자리를 잡았다.
당시에 버스에서 내려 처음 마주친 파주옥의 꼬리곰탕집은 지금도 성업 중이다.
평택에 살며 서울로 지방으로 전전하면서 45년을 평택에 거주했다.
1970년대 초여서 모두가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다.
물론 나도 힘든 보릿고개 같은 길을 걸어야만 했다.
이곳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결혼도 하여 1남을 두었다
지금은 충북 괴산으로 터전을 옮겨 11년째 거주 중이다.
공주시 계룡면 경천리 62번지는 아직도 나의 본적지 주소이다.
국민학교와 중학교가 있으며 넓은 시장터와 [2,7일 장날]오래된 교회건물[2층]과 양조장[2층]이 있으며 방앗간이 2곳이며 물레방아도 여러 곳에 있었다.
이발소가 2개소 미장원도 1개소에 철물점이 1개소 한의원과 약국이 있었으며 양복점이 2곳 양장점도 1곳이 있었다.
의용 소방서 건물이 있었으며 망루에는 수동 사이렌이 설치되어있었다.
화재가 발생하면 수동 펌프를 돌려서 호스를 이용하여 진화작업을 하였다.
상여를 만드는 곳도 있었으며 제수용품을 판매하는 건어물 상점과 생선 가게 및 잡화를 파는 가게도 여러 곳이 있었다.
식당과 술집도 당연 있었으며 장날에는 더 많은 가게가 열리기도 하였다.
고기를 파는 정육점과 도살장도 있었다.
포목점과 주류도매업소도 있었다.
참기름을 짜는 기름 방앗간도 2곳으로 기억한다.
자전거 수리하는 곳과 철공소도 있었다.
사진관도 있었으며 성냥만드는 공장과 석탄가루에 물을 부어 삽으로 퍼서 나무망치로 두드려 만드는 수동 연탄가게도 있었다.
이발소 앞의 전파사는 하루 종일 노래를 틀어주었다.
그 외 담배 가게와 고무신 가게 및 양곡 상회도 있었다.
문방구가 학교 정문 앞에 몇 곳이 있었고 만화책을 빌려보는 책방도 있었다.
고물상도 2곳으로 엿을 직접 만들어 팔았다.
철제 송전선로가 지나면서 변전소 건물이 있었으며 유일하게 전화가 설치되어있던 걸로 기억한다.
모든 걸 재활용하는 땜쟁이[납땜 전문] 아저씨네 가게도 있었다.
몇 년 후에는 석유 기름집과 사료 판매하는 가게가 문을 열였다.
대장간은 장날에만 2곳에서 망치를 두드렸으며 뻥튀기 아저씨도 장날 2분이 나오셨으며 고무신 장화만 때우는 분도 나오셨다.
시계수리 전문으로 하시는 분도 장날에 나오시고 약장사가 하루 종일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계룡산 정상인 천왕봉[예전에는 천황봉이었는데] 우리는 당시에는 상봉으로 불렀다.
해가 넘어가면 이곳의 상봉의 콘센트 막사로 지어진 군부대에서 전기를 사용하려고 발전기[발동기 소리] 돌아가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한다.
우리 동네는 치국산에 가려 정상보다 연천봉이 더 잘 보였다.
고향 떠나기 전에 건설된 경천 저수지가 운치를 더해준다.
양화리 들어가는 계곡 입구의 물레방앗간 [쳉면]을 지나온 물줄기는 도랑을 따라 흐르다가 자전거포 앞에서 좌우로 갈라진다.
경천 장터를 통과하는 물줄기와 중학교 정문 앞으로 흐르는 물줄기이다.
돌징이는 돌우물 즉 돌 틈에서 물이 솟는 곳이라서 그렇게 불린다,
이물은 아주 오래전에 만들어진 경천 들판의 젖줄이다.
1960년대 중반에 계룡저수지가 만들어지고 후반에 경천 저수지가 완공되어 물 걱정은 없어도 물은 그대로 흘렀다.
동학농민군의 발자취가 지나간 장터의 역사는 말이 없다.
이들은 공주의 우금치 전투에서 좌절되었지만 경천 장터에서 전의를 불태웠다 한다.
치국산 역시 나를 다스린다는 治國山이었지만 백제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슬픈 역사로 恥國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산 정상에는 허물어진 성벽의 흔적들이 무수히 많다.
23번 국도의 화헌리[하마루] 버스 정류장은 당시에 호남에서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다.
경부와 호남 고속국도가 개통이 되면서 그 역할은 줄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흙먼지 날리며 버스와 화물 트럭이 밤낮없이 서울로 서울로 달려 올라갔다.
지금은 23번 국도 역시 4차로 확장되면서 고개 넘어 상성리로 해서 상월 방면으로 달려 내려간다.
화마루는 이제 그냥 조그만 사거리일 뿐이지만 나에게는 엄청난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상평[생평] 마을과 상보안 그리고 들말로 해서 용머리, 등정골까지의 넓은 들판은 기름진 곡창지대로 우리에게 양식을 내어주었다.
경천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장마 때마다 하천의 넓이가 움직였다.
양조장과 정미소 주인인 김 사장님이 불도저와 수동 궤도차를 이용하여 용머리 뒷산에서 흙을 옮겨 성토한 후 논으로 만드는 토목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수동 궤도란 작은 미니 철길을 산 위에서 저 아래 개울까지 몇 백 m를 연결한 후 쇠바퀴 4개 달린 송판을 이어 붙인 밀차를 올려놓고 그 위에 삽으로 흙을 담은 후 나무토막 브레이크로 속도 조절을 하면서 내달려 내려가는 원리이다.
끝에 도착하면 두 명이 힘으로 밀거나 들어 올려 흙을 쏟거나 삽으로 퍼낸 후 두 사람의 힘으로 밀어서 산 위까지 힘들게 올라간다.
광산에서 사용하는 궤도차를 연상하시면 될 것이다.
1962년 당시에 유일하게 교회 유치원에서 공부를 했다.
당시 우리 선생님은 고 임*현 선생님으로 기억한다.
얼마 후 국민학교 교사인 곽*영 선생님과 결혼하셨으나 첫아이 출산 중에 아이와 함께 유명을 달리하셨던 걸로 기억된다.
당시 교회건물은 2층으로 올라가는 넓은 계단이 있었으며 그 위에 교회 종이 있어 주일날이면 종소리가 멀리 까지 들리었다.
우리는 1층의 마룻바닥에서 10명 안팎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공부를 했다.
당시 내 나이는 9살이나 되었지만 입학 통지서가 나오지 않아서...ㅠㅠㅠㅠㅠㅠㅠ.
교회 바로 옆길은 구비안을 지나 황새울로 이어지는 길목인데 기둥이 4개인 대문 형태의 기와 건물이 있었으나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으니 안타깝다.
1971년 고향을 떠난 후 전국적인 새마을 운동이 시작되고 전기가 들어왔으며 [경천 1구와 2구는 이미 설치됨] 초가지붕이 개량되었으며 마을 안길 이 포장되고 국도와 지방도로가 아스팔트로 깔끔하게 포장되었다.
고향이지만 반겨주는 그리운 손길은 몇 안 된다.
옛 추억을 찾아 가도 그때 그 시절의 풍경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게 변하고 사람도 변해서 씁쓸하다.
그래도 내 고향 경천을 사랑한다.
'오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근감 [96] (0) | 2021.04.17 |
---|---|
토끼의 억울함 [95] (0) | 2021.04.17 |
길 [93] (0) | 2021.02.24 |
개구리 이야기 [92] (0) | 2021.02.22 |
갈등과 모순 [91] (0) | 2021.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