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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동시상영 [85] 본문
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블로그입니다.
찾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21년 1월이 되었다.
코로나 19라는 역병이 지구촌을 강타하고 있다.
사람들이 모여서 말을 하면 공기를 타고 세균을 옮기는 병균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당연 금기시되고 일부러 만나는 일도 안된다.
극장의 영화 관람은 더욱 안되는일이다.
충청도 산골에서 유년기를 보낸 본인은 가설극장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영화를 본 것이 전부였다.
당시에는 거의 흑백영화였으며 외화는 볼 수가 없었다.
당시 천막극장의 경우는 입장요금이 5원에서 10원 정도였다.
빨간 마후라는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라 해서 10원을 받았다.
그 외는 5원을 받거나 무료 상영이었다.
19살 무렵에 서울 신촌역 앞의 하드 대리점에서 배달을 하였다.
여름철에 새벽부터 대형 냉장고에서 하드를 받아서 자전거에 싣고 한 바퀴 돌아오는 코스였다.
우리는 얼음주머니 대신에 드라이아이스를 사용했다.
신촌역 앞을 지나 이대입구를 돌고 다시 대현동 산꼭대기를 돌고 돌아 북아현 시장을 지나서 굴레방 다리를 돌아오는 코스였다.
아침을 거르고 보통 10시에서 11시 사이에 배달이 완료된다.
이때 라면 1봉을 곤로에 끓여먹고 오후 5시까지는 노는 시간이다.
해저 녁에 수금을 돌거나 추가 배달도 하였다.
12시경에 배달하고 남은 박스를 모아서 고물상에 가져가면 100월에서 200월을 받는다.
이 돈을 가지고 큰길 아래의 마포구 염리동에 있는 대흥극장으로 향한다.
당시 입장요금이 100원 정도였으며 동시 상영으로 한번 입장에 영화를 2편이나 감상할 수 있다.
그해 6월에서 10월까지 평균 2~3일에 한 번씩 프로가 바뀔 때마다 관람을 했다.
평생 못 보았던 영화를 다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극장은 언제나 초만원이었으며 한 여름에도 냉방장치는 없었다.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작은 부채로 연신 부채질을 하며 관람을 했다.
당시에 동시 상영에 다른 극장의 절반값이었으니 당근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친구들과 몰려갈 때는 보았던 영화를 다시 볼 수밖에 없었으니 같은 영화를 몇 번이 본경 우도 있다.
외화 중에 바이킹과 도라 도라 도라 등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아마도 1972년도쯤으로 기억된다.
상록 문화사[만화책 인쇄공장으로 생각난다] 건물 바로 옆이라서 이곳에 다니는 또래 몇 명이 친구였다.
어디서 잘살고 있나? [한창수, 정해설, 박춘길. 김대유, 김기성]
그 시절에는 명절은 누구든 영화 한 편은 꼭 보아야 하던 시절이었다.
친한 친구나 친인척이 찾아오면 반드시 극장을 다녀와야 했다.
기억나는 외화는 7인의 신부, 자이언트, 벤허, 황야의 무법자 등 서부 영화였으며 70년대 말에는 이소룡과 성룡이 혜성 처럼나왔으니 중국 영화의 전성시대가 되었다.
극장의 분위기는 요즘은 상상도 못 할 수준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고 술을 먹고 떠들어도 필름이 끊기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욕설이 난무했다.
오죽하면 좌석 맨 끝에 의자 두 개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으니 이곳이 경찰들이 앉는 임검석이었다.
영화 상영이 끝나면 막간에 껌과 과자 술을 파는 사람들이 좁은 통로를 따라 소리 지르며 바쁘게 돌아다녔다.
극장 로비의 매점에는 사람들이 줄을 섰으며 화장실 입구는 그 특유의 냄새가 진동을 한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같은 영화를 두 번 세 번 감상하고 나왔다.
추석 명절날은 저녁에 친구들과 극장을 찾았다.
명절 다음 다음날이라서 마지막 상영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2층짜리 극장인데 그날따라 아랫층 맨앞줄에 자리를 잡았다.
빈자리는 많고 상영 시간이 많이 남아서인지 친구들이 장난을 시작했다.
숨바꼭질 형태로 통로를 뛰어 다니고 심지어 의자를 밟고 건너뛰기도 했다.
처음에 몇바퀴 돌다가 나는 힘들어서 포기하고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친구들 손목에 수갑이 채워지고 있었다.
사복형사들이 건수 채울려고 소란죄목으로 연행한다.
나 혼자만 남고 친구들은 밖으로 형사들을 따라나갔다.
이들은 3일후 서대문 경찰서 유치장에서 좋은 경험을 하고 나왔다.
물론 머리도 고속도로가 만들어지고......
서울시내 중심가에는 개봉관이라해서 요금이 비싼곳이 여러 곳이 있었다.
변두리의 동시상영관은 언제나 초만원이였다.
고향에서 가설극장이 들어오면 돈도 없으면서 저녁마다 찾아갔다.
재수 좋으면 아는 사람 따라 입장도 가능했으며 영화의 7할이 상영되면 문을 열어놓았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하며 줄기차게 나들이했다.
그러다가 영화 감상 복이 터져버렸으니 행운이 아니였던가?
신문파는 아이에게 10원을 주고 석간 신문을 펼쳐본다.
5,6,7,8면의 하단에는 영화광고가 빼곡하다.
물론 개봉영화이지만 미리 보아두면 1~2년후 동시 상영관에서 보게 된다.
그시절의 영화배우들 대부분이 고인이 되었다.
액션 영화를 좋아해서그런지 박노식,허장강,황해,독고성,장동휘,장혁,신영균,신성일,최무룡등이 생각난다.
1970년대 말에는 극장에서 대형 가수들의 쇼가 등장한다.
1977년 가을 이리역 폭발사건으로 하춘화를 구한 이주일이라는 코미디언이 인기 스타가 된다.
지금은 tv에서 온갖 영화를 질리도록 볼수가 있으니...
그래도 그시절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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