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나 어릴적에 [302] 본문

오늘의 이야기.

나 어릴적에 [302]

현덕1 2024. 10. 8. 20:07

최인태의 세상이야기 T 스토리입니다.

방문 해주신 모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내 나이 10살 이후는 기억이 선명하지만 그이전에는 희미하다.

10살에 경천국민학교에 2학년으로 입학을 하였다.

학교 생활이 시작되었으니 나의 머릿속에 기억이라는 단어가 입력이 되었던 것이다.

10살이 되고 새학기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무슨 이유인지 입학 통지서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동네 또래 아이들이 많아도 모두가 학교에 갔으니 혼자 놀아야 했다.

열흘 정도 지난 어느날에 어머니가 국민학교 교과서 6권을 가지고 오셨다.

정터의 담배 가겟집 아들이 사용하던거라며 이것을 가지고 내일 학교에 가란다.

 

1년전인 9살[1961년도] 3월이 시작되었다.

마을 어귀에 나와보니 동네 아이들 모두 책보를 들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부러웠다 하지만 나는 웬일인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집안에서 누구도 걱정하지도 않았다.

어느날에 아이들을 따라 학교로 갔다.

넓은 운동장을 가득 메운 아이들 그런데 잠시 후 종이 울리더니 모두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들어갈수가 없으니 홀로 남았다.

어린 나이지만 자존심에 학교를 나와 걸었다.

학교 바로 건너편의 경천 교회 종탑 올라가는 계단에서 혼자 놀기를 한다.

바로 옆에는 지금은 화재로 소실된 이문[里門]이 있었다.

기둥이 네개이며 지붕은 기와를 얹었다.

경천 역참이 있었다는 증거였는데...

고려, 조선 시대에는 한양과 지방을 잇는 길목에 지어진 관청 건물이다.

역참이 있던 자리에는 양방향으로 문을 세웠다.

교회 옆이 이문은 윗이문이라고 불리웠다.

용머리 나가는 길목에는 아랫이문이 있었다고 한다.

이랫 이문은 6,25 전란에 소실되었다고 한다.

교회 옆에는 경천 중학교가 있었다.

운동장에는 중학교 형들의 수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경천 교회를 개축하면서 옛날 건물은 사라졌다.

외벽은 돌을 쌓은 석축 형태였으며 내부는 목조 2층 건물이다.

외부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넓게 만들어 졌으며 계단위 테라스에는 교회종이 걸려 있었다.

어릴때 기억에는  주일이면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날도 계단에서 혼자 놀고 있는데 선생님이 부르는 소리에 돌아봤다.

너 누구니?

왜 여기 혼자있니?

예 성밑에 살아요.

아직 학교에 못가서 여기서 놀고있어요.

그러면 이리 들어오너라하고 부르신다.

교회 1층 마룻바닥에는 또래 아이들 몇명이 앉아 있었다.

경천 교회 유치부 어린이들이였다.

책상도 없고 의자도 없어 바닥에 둥그렇게 모여 앉아서 선생님 말씀을 들으며 공부를 하였다.

교회 유치원 특성상 아침 첫 시간에는 돌아 가며 교대로 아침 기도를 하였는데 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였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희미한 기억은 내가 기도를 올리는 장면은 떠오른다.

 

이곳도 수업료를 내야 한다.

아마도 여름에 보리 한말 가을에는 쌀 한말인가로 생각난다.

할머니께서 보리쌀 한말을 선생님 댁으로 가지고 가신것으로 기억한다.

그 선생님 집이 오래전에는 조부모님과 이웃하셨던 분들이라고 하셨다.

정식 교육은 아니지만 그래도 선생님을 모시고 열심히 공부하였다.

당시에는 마분지 종이 한장을 받아서 연필로 기역니은디귿을 받아 적거나 직접 쓰면서 배웠다.

1년을 다 채웠는지 기억은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한글은 거의 배운것 같았다.

이듬해 국민학교에 2학년으로 월반[越班]했다.

처음으로 책상을 앞에 두고 의자에 앉아 짝꿍과 함께 공부를 하였다.

1학년을 다니지 않고 월반해서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였다.

국어시간에는 받아쓰기와 누구 누구일어나 몇 페이지 읽어봐라 하는 식으로 진행하였다.

하지만 책을 읽지 못하는 친구들이 의외로 많아서 놀랐다.

내 차례가 되어 짧은 문장이지만 나는 또박 또박 읽었다.

그리고 뿌듯한 마음으로 공부에 전념하였다.

 

2학년에서 3학년으로 다시 4학년이 되었다.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유독 관찰하시면 많은 관심을 가지셨다고 느꼈다.

4학년은 약 65명이 전부 남학생으로만 되어 있다.

혈기 넘치는 젊은 선생님의 특별한 교육방식 같았다.

전날 시험을 보면 그 다음날에는 성적에 따라 1분단 맨 앞줄에 1등과 2등을 나란히 앉게 하셨다.

다음 시험 보는 날까지 그자리는 지켜졌다.

맨 앞줄에 앉는 영광을 몇번 누려 보았다.

다른 교실은 키 순서대로 분단 별로 자리를 배정하였는데...

그래서 남보다 키가 조금 더 컸던 나는 항상 맨 뒷자리에 앉아야 했다.

내성적인 성격에 혈액형은 A형으로 숫기는 1도 없는 수줍은 많이 아이였다.

담임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용기를 갖고 발표도 하고 큰 소리로 남들 앞에 나서 보라고 하셨는데 결국 실망만 남겨 드렸으니 ...

이자리를 빌어 선생님 제가 못났습니다 죄송합니다.

 

5학년 1학기 때인가 같은 담임 선생님이 나를 교무실로 불렀다.

A4 용지에 빼곡하게 글을 쓰셨는데 나보고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읽어 보라고 하셨다.

거절하면 혼날것 같이 모기 목소리로 대답하고 종이를 받아 교무실을 나왔다.

다음날 아침 전교생 조회가 운동장에서 있었다,

교장 선생님의 훈시가 끝나고 우리 담임 선생님이 연단에 오르시더니 나를 부르면 올라오란다.

선생님께서 뭐라고 말씀 하신후 내려 가셨다.

홀로 남겨진 나는 눈앞에 1,000여명의 학생들이 나를 쳐다 본다는 중압감에 사로 잡혀 온몸이 사시나무 처럼 떨고 있었다.

무슨 내용인지 생각도 안나지만 다 읽고 내려왔다,

수고했다는 짧은 말씀만 하셨다.

그해 가을에  선생님의 우리집 가정 방문후 관심은 나에게서 멀어져 가셨다.

6학년에 되자 선생님은 중학교 진학반을 꾸린후 1반 담임을 맡으셨다.

당시에는 중학교도 입학 시험을 보았으며 일정 이상의 점수를 받아야 입학을 하였다.

그래서 바로 옆의 경천 중학교 보다 더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위해 특별반을 꾸리신 거였다고 한다.

공주 소재의 공주 중학교,신설학교인 공주 북중학교 그외 서울이나 대전의 중학교 진학반이였다.

나는 중학교는 꿈도 꿀수 없는 처지라서 덤덤했다.

 

국민학교의 수업료인 기성회비 나중에 육성회비[사친회비,또는 월사금]를 내지 못해 날마다 선생님에게 시달림을 받는 처지였으니 선생님의 관심이 나에게는 사치였을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반 전체 학생의 20% 정도는 공부가 끝나도 곧바로 집에 가지 못했다.

전교 학생 모두 집으로 돌아간 후 따로 남아 선생님께 언제까지 납부한다는 말을 해야 집으로 갈수가 있었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집에 돈을 두고 안주는것이 아니기에 더 안타까워 하셨겠지만 우리는 알수 없어 애만 태웠다.

그렇다고 부모님을 원망할수도 없었다.

집안 사정을 어린 나이지만 넘 잘알기 때문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문구가 하나 있다.

장- 보- 고...

해상왕 장보고가 떠오르겠지만 전혀 관계가 없는 말이다.

선생님이 언제까지 낼거냐고 물으면 우리는 항상 같은 대답이다.

엄마가 장을 보고 돈을 준다고 대답을 합니다.

즉 경천 장날 장이 서면 무엇이든 팔아서 그 돈으로 기성회비를 납부한다는 말이지요.

 

소충가는날이 서글픈 날이기도 하였다.

봄 소풍은 그런대로 가는데 가을 소풍은 별로 가지 않았다.

그날은 우리집 고구마 수확 하는날이다.

돈 10원도 안주니 뭐하러 가나 차라리 집에서 일이나하자.

소풍날 빠져도 결석 처리하지 않아서 부담은 없었다.

신원사로 소풍을 가는데 당시에는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이라 쳉면 물레 방앗간 옆길로 걸어 가면 양화리 동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걸어간다.

학교에서 신원사 까지는 약 십리길이다[4km]

목적지에 도착하면 자유 시간이다.

이미 장사하는 사람들이 먼저 도착해서 이것 저것 팔고있다.

대부분이 사탕이나 과자였다.

하지만 많이 주면 10원[지폐] 그렇지 않으면 5원 그돈으로 무엇을 사먹을까 고민한다.

5원어치는 내가 사먹고 나머지 5원어치는 도시락 보자기에 담아서 집으로 갖고온다.

형제들끼리 나누어 먹으려고...

5째 동생이 사이다 한병을 사서 반은 마시고 뚜껑도 없는데 흘리지 않고 집으로 갖고왔다.

형제들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나누어 마시는데 어라 이게 아닌데...그냥 맹물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탄산가스가 모두 사라져 버린것이다.

 

1960년대가 어린이 였다면 1970년대는 청년 시대였다.

1954년 7월에 태어났으니 정전협상이 이뤄지고 이땅에 포성과 총성이 멈춘지 1년이 지난해였다.

어린 나이지만 배고픔은 기억이 잘안나서 모르겠지만 보리밥을 먹은것은 어제 일같다.

보리밥은 미리 살짝 삶은후 작은 대나무 소쿠리에 담아서 시렁 [설겅]에 올려 놓는다.

급할때는 그냥 먹기도 하는데 너무 거칠어서 다음날 큰일 볼때 약간은 힘들기도 한다.

다음날에는 시렁에 얹혀 있는 보리밥을 꺼내서 솥에 다시 붓고 물을 넣은후 끓인후 밥그릇에 담아 먹는다.

한결 부드러워 먹기에 편하다.

소화도 잘되고 가스 배출도 잘되어  속이 편하다.

보리밥이 먹기도 껄끄럽고 색깔이 거무튀튀해서 먹기 싫지만 배고픔을 면하려면 다른 선택이 없다.

그런 보리밥이라도 배불리 먹으면 다행이였으니까?

 

충청도 산골 마을에 서울에서 대학생 봉사대가 내려왔다.

아마도 1964년 아니면 1965년으로 기억이 난다.

동네 어른들이 종만이 형네 집에 모두 모이셨다.

우리는 아이들이라 방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마당에서 들어야 했다.

내용은 기억 나지 않지만 당시에 책을 몇 권을 나누어 주었는데 책 표지는 자유의 벗이였다.

워낙 책이 귀한 시절이라서 제대로 읽지도 못했으며 내용 중에 영화배우 김희갑씨의 사진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학생들은 의약품 몇가지와 책 그리고 엄마들 여성에게만 필요한 무슨 교육을 한것으로 알고 있다.

마지막날에는 마을 어른들이 풍물놀이로 한바탕 흥을 돋구었다.

선친께서는 북을 치며 마당에서 신명나는 풍장 놀이를 하셨다.

당시 우리 동네에서는 풍물이라 하지 않고 풍장을 친다고 하였다.[한국어 사전에는 풍장이란 풍물놀이를 달리 이르는 말이라고 적혀있다.]

 

우리는 1년에 한번은 공포에 질리거나 떨어야 했다.

학교에서 결핵 예방하기 위하여 BCG와 장티푸스나 기타 질병의 위험성 때문에 예방주사를 맞아야 했다.

어느날에는 남녀 핵생 모두를 운동장에 세운후 머리에 하얀 밀가루 같은 약제를 뿌렸다.

여학생의 경우는 머리카락속에 이,벼룩,빈대등이 있어 DDT라는 밀가루 같은 약제를 뿌렸다.

남학생들도 박박머리였지만 기계충이 많아서 예외는 아니였다.

지금은 사용이 금지된 농약[화학살충제]에 해당한다.

겨울철이면 손발의 피부가 노출되어 피가 질질 흐르기도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동상을 입어도 약을 바르지도 않고 비누가 없어 제대로 씻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겨울철에는 밤마다 속옷을 벗어 이를 잡아야했다.

등잔불빛 아래 잘보이지도 않지만 날마다 잡을수록 몸이 편하다.

너무 작은 이는 눈에 보이지 않아서 등잔불에 직접 닿아서 지져버렸다.

그러면 타닥 타닥하고 타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옛날의 긴 겨울밤이 시작되는 초저녁 방안의 모습이 새삼 떠오릅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 추억은 쌀밥에 고기는 먹지 못했지만 가난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배 부르지도 배 고프지도 않았으니 전후 세대의 삶은 비교적 나쁘지않았던 같습니다.

시간의 흐름이 세월이 지나가는것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았습니다.

이젠 미래의 앞 날 보다 과거의 추억과 기억이 더욱 소중해지네요.

지나간 날의 아쉬움은 그리움으로 남기고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오늘이 가장 젊은날이니까요?

 

 

 

 

'오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떡 [304]  (0) 2024.10.16
바보하고 싸우는 네가 더 한심하다 [303]  (0) 2024.10.15
씨 도둑질은 못한다더니 [300]  (0) 2024.08.19
기후 변화 [299]  (0) 2024.08.08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298]  (1) 2024.08.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