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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그 시절 경천리 스피커 방송(13) [159] 본문
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블로그입니다.
찾아 주신 모든 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약 60년 전의 스피커 방송 이야기입니다.
라디오도 귀했던 그시절에 오늘날의 tv 유선 방송하고 똑같은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
공주군 계룡면 경천리 1구는 장터와 주막거리, 상보안과 생평, 2구는 돌징이와 성밑 마을, 3구는 용머리와 등정골 들말 마을로 이루어졌다.
당시의 인구는 정확히 알수가 없지만 가구당 평균 10명 가까웠다.
우리 집은 13명이 한집에 살았다.
경천 2 구인 성밑 마을은 약 30여 호에 인구는 약 250명으로 추산된다.
돌징이 가구수는 성밑 마을 기준으로 대략적으로 계산 헤보면 약 2배 수로 인구수는 약 5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해본다. 경천 2구의 인구는 약 750명으로 보면 경천 1구의 가구 밀집과 상보안 생평까지 포함하면 1,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경천 3구 역시 3개 마을을 합산해보면 약 1,000여 명에 이룰 것으로 추산된다.
1960년대 경천리 1,2,3구의 전체인구는 약 3,000여 명으로 추산해본다.
1968년 당시의 경천 초등학교 학생수는 약 1,000명이 넘어서 상성 초등학교로 분교 예정이었다.
물론 초등학교의 학생은 경천 인근의 양화리, 금대리 2구와 화헌리, 상성리, 월곡리, 죽곡리가 있었다.
경천 주막거리 공 씨 아저씨 양복점 뒷골목에 위치한 신*철 아저씨 댁에 스피커 중계설비가 마련되고 각가정으로 전선으로 [삐삐선] 연결되는 시스템이다.
국그릇 같은 대접 뒤집어 놓은 형태로 마루나 방안의 기둥에 못을 박고 걸어 놓는다.
볼륨 조절 손잡이나 온오프 스위치는 기억이 별로다.
암튼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리 동네는 용두천 줄기의 갱변을 건너서 여러 집으로 연결하였다.
무료가 아니고 유료 방송이라서 소위 가입하지 않으면 그 집에는 설치하지 않았다.
사용요금은 보리 수확 후 약 한말 정도 받고 가을에는 벼인지 쌀인지 약 1말 정도 받는 것으로 기억한다.
전봇대 없이 산에서 적당한 나무 잘라서 기둥을 세우고 선을 연결하다 보니 비바람에 쓰러지면 당연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러면 전선을 따라가다 보면 쓰러진 나무기둥을 다시 세워주면 되었다.
주막거리 기준으로 우리 동네 성밑 그리고 용머리와 산을 넘어 등정골까지 연결되었다.
지금의 tv 유선 방송 시스템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 집은 마루에 있는 가운데 기둥에 걸어두었다.
아침 일찍 잠자리에서 라디오 소리를 듣고 일어났다.
지금도 기억나는 내용은 새벽 05시 30분부터 방송되는 내용은 일기예보로 기억된다.
당시에는 관상대로 불렸다.
기상대 이전의 명칭이다.
관상대 발표 오늘의 바다 날씨부터 시작된다.
서남해의 섬 이름이 호명되면서 파도의 높낮이와 물때를 [밀물과 썰물] 설명하는 내용 같았다.
충청도 내륙 깊숙한 산속에 살다 보니 바다 구경 한번 못했으므로 상상으로만 방송을 들었다.
06시 정각에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30분에는 월남전 소식이 방송되었다.
우리 동네 형님들이 월남전에 참전 중이었으므로 대단히 중요한 방송이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용이 그렇습니다.
어제 월남의 퀴논 지역에서 맹호부대와 베트콩과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우리 군은 몇 명의 부상자만 발생했으나 적군인 베트콩은 수십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어린 내가 들어도 이상한 방송 내용이었다.
당시 임택근 아나운서의 스포츠 중계방송은 대단했으나 시골 사람들이 중계 내용과 해설의 내용을 알아듣지 못해서 별로였다.
내 기억에는 필리핀에서 개최된 1969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의 신동파 선수의 활약이 대단했던 것으로 생각난다.
1967년 한여름의 무더위가 막바지에 이를 즈음에 청양의 구봉광산에서 매몰된 양창선[후에 김창선으로] 아저씨의 매몰부터 구출까지 연일 방송되었다.
이중간첩 이수근의 이야기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 미수 사건인 1,21 사태 등 기억난다.
박치기왕 김일 선수의 활약상도 방송되고 복싱선수인 김기수 선수의 이야기도 방송되었다.
가장 유명한 방송은 낮 12시 55분에 방송되는 김삿갓 북한 방랑기이다.
5분간 방송되었는데 방송 내용보다 김정구 선생의 눈물 젖은 두만강의 전주곡이 더욱 선명하다.
저녁에 방송되는 드라마[연속극]는 지금도 그 내용까지 생각나는 삽다리 총각이 있다.
삽다리는 충청도의 삽교의 옛 지명으로 시골 청년의 장가도 안 가고 일만 하는데 개갈이 안 난다고 했으니...
이런 시골에 1969년 닐 암스트롱 씨가 달나라에 다녀올 때 우리 동네에 tv가 등장했다.
경천 장터의 담뱃가게 아랫집에서 주류 도매업을 하시던 이사장님이 아주 작은 흑백 tv이었다.
소문을 듣고 그날 밤에 구경을 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었다.
다행히 키가 커서 살짝 보았지만 노이즈 현상에 화면이 너무 작고 소리도 정확하게 들리지 않았지만 그림이 나오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더 심각한 것은 장터에 사는 또래 아이들의 텃세가 대단했다.
기분이 나빠서 한번 보고 안 보려 했는데...
도대체 아이들과 대화가 안 되어서 며칠 후 한번 더 구경을 갔었다.
1967년인가 68년인가 경천 소방대 마당에서 영화 상영이 있었다.
열흘 이상 상영되었는데 너무 호황이라서 마지막 날에는 경품 추첨이 있었다.
입장권의 번호를 불러주면 맞는 사람이 손을 들면 상품을 주었는데..
당시 최고의 인기인 트랜지스터 직사각형 라디오였다.
우리는 입장권이 없어서 구경만 하는데 1등 번호가 불러지고 갑자기 큰소리가 터져 나왔다.
모두가 긴장하는데 사촌형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다 형님께서 1등에 당첨되어 라디오를 수령하였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에 그 라디오가 우리 집에 며칠 다녀갔다.
누나들이 형에게 부탁해서 빌려온 것이다.
이제는 추억에만 존재하는 그 시절의 스피커 방송 라디오는 사치품이고 더구나 tv는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성밑 마을에서 우리 집은 외딴집이라 어려웠지만 설치되었다.
팽나무에서부터 나무 기둥이 여러 개 서있었다.
스피커는 특성상 방송을 선택하는 다이얼은 없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주야장천 kbs 라디오만 들었던 같기도 하네요.
왜냐면 집집마다 항상 같은 소리만 들린 것 같아서요.
60년 전의 일인데 희미한 기억에만 의존하려니 한계가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산골에 대단한 방송 시스템이었습니다.
대부분의 시골에는 전기가 안 들오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경천리는 변전소가 있어서 그런지 전기는 오래전에 설치된 것 같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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