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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태의 세상 이야기.
지게를 지다, 2편 [341] 본문
최인태의 세상이야기 T스토리입니다.
방문해 주신 모든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지게의 용도는 다양합니다.
오늘날 처럼 자동차나 기차 등 운반 수단이 없을때 아주 유용한 방법이였을겁니다.
지게는 산에 있는 흔한 나무로 만든 운반도구이며 가난한 사람에게는 돈벌이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지게의 종류는 단순한 농사용부터 물을 나르는 물지게 인간의 배설물인 대소변을 모아 통에 넣어 지고 나르는 똥 장군이라 부르기도 하였구요.
설화이지만 연로하신 부모님을 고려장으로 모실때도 유일하게 지게에 모시고 산에 올랐다합니다.
제 지인의 이야기 입니다.
1970년대 중반 시골에서 농삿일을 하였으나 본인의 농지가 없으니 죽어라 일해도 세끼 밥먹기 힘들었다 합니다.
거기에 자녀들이 셋이나 태어났으니 살길이 막막하였다합니다.
당시 유행하던 무작정 상경을 실현하였다네요.
아이들과 5식구는 서울의 외곽 판자촌에 셋집을 얻고 살길을 찾아 나섰지만 반겨주는곳 없으니 하루 하루가 힘들었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서울의 어느 골목길을 걸어 가는데 뒤에서 갑자기 큰 목소리로 비켜요 비켜 똥물이 지나갑니다하는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바로 앞으로 똥 지게를 지고 똥 냄새를 가득 풍기며 달려가더랍니다.
그 뒤를 따라 가보니 조금 넓은 골목 어귀에 지동차가 서있는데 발판에 한사람이 앉아서 기다리다 똥지게가 오면 손으로 받아서 자동차의 둥그런 탱크의 뚜껑을 열고 그안데 쏟아부었답니다.
그리고는 그 지게를 지고 온 사람의 이름인지 무슨 표시를 하더라네요.
이것은 그사람이 지게에 지고 날라온 횟수를 기록하는 것이지요.
그 횟수가 즉 돈이 되구요.
잠시 구경하다가 물어보았다네요.
이거 나도 해보고 싶은데 어찌하면 되나요?
그말을 듣고 한참을 위 아래로 훑어 보더니 정말 할수있겠소하고 묻길래 할수있다 하니 내일 어디로 나오라고 알려주더랍니다.
첫날 똥지게를 지고 달려보니 시골에서 몇번 해보았지만 환경이 달랐던 것이지요.
시골에서는 본인 편한대로 걸어가면 되는데 그리고 내집에서 하는 일이라서 마음 편하게 했는데 여기서는 속도전이며 걸어가면서 이집 저집 대문을 열고 똥퍼라고 소리도 질러야 했으며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오늘 왔으니 화장실을 치우리고 설득도 해야 했으니 정말로 사는게 고달펐을겁니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파이프를 연결하여 흡입하는 방식이 아닌 완전 수동으로 그야말로 인간의 손으로 모든것을 해결하던 시절이였으니까요?
혹시라도 고향 사람 만날까봐 걱정도 되지만 그래도 돈벌이가 되니 힘든줄 모르고 열심히 몇년을 했더랍니다.
돈이 조금 모아져서 그대로 서울에 살수 없어 수도권의 서울 외곽으로 이사했답니다.
서울보다 땅값이나 집값도 저렴해서 작지만 땅을 사고 집도 지었다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똥퍼가 아닌 건축 현장으로 가서 조적공 벽돌 쌓는 기술을 배워서 자녀들을 양육해서 결혼도 시키고 어느 정도 나름 성공했답니다.
모두가 싫어하는 똥지게지만 그분에게는 금 지게였다고 말할수 있겠습니다.
고려장이 실제로 있었다 아니다 꾸며낸 이야기이다 등등 설이 많습니다.
역사에는 나오는 말이니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할수는 없을겁니다.
그렇게 유행하던 고려장의 결말이 낡은 지게 때문이라면 믿으시겠습니까?.
연로하신 어머니를 지게에 지고 산에 오르는데 아들 녀석이 따라 오더랍니다.
3대가 힘들게 깊고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적당한 자리에 어머니를 모시고 큰 절을 하며 인사를 올렸답니다.
그리고 낡은 지게를 버리고 돌아서서 내려오는데 어린 아들이 그 지게를 지고 오길래 물었답니다.
이제 그 지게는 버려야 한단다.
거기에 두고 오거라하고 말하자 아들이 대답을 합니다.
아닙니다 아버지 이걸 가져가야 나중에 아버지를 여기에 제가 지고 와야하니까요?
그말을 들은 순간 아차차...
그 지게에 다시 어머니를 모시고 산을 내려와서 효도를 하였다는 전설같은 설화였답니다.
낡은 지게 하나가 불효 막심한 행동을 막아냈다고 할수가 있지요.
예전에는 옹기장수, 새우젓장수, 소금 장수등 물건을 지게에 지고 장삿길에 나서는 사람들이 많았을겁니다.
그들의 두 어깨는 무거울수록 돈벌이가 더 되었을겁니다.
가장 무거운 장사는 아마도 옹기 장수였을겁니다.
옹기는 깨지기 쉬운 물건이라 단단하게 묶어야 했으며 무게가 많이 나가서 그만큼 더 힘들었을겁니다.
장사의 이윤이 어떻게 나오는지는 잘모르겠지만 이들은 돈을 벌려고하는 일이였으며 직업이기도 하였지요.
당시에는 도로가 없어 산길, 밭두렁길,논두렁길이나 들판을 하염없이 걸어가야 했을겁니다.
걸어가다 강이라도 만나면 물길을 건너는 일도 쉽지는 않았을겁니다.
산고갯길을 힘들게 넘어야 했으며 눈비가 내리면 잠깐 쉬어가기는 하겠지만 쉬운 길은 아니였을겁니다.
물건을 다 팔았다고 지게를 벗지 못하고 다시 다른 짐을 지고 장삿길에 나섰을겁니다.
자식 많은 엄마소 질마[길마] 벗을 날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질마재라고 부르는 고갯길이 있습니다.
힘들게 짐을 등에 얹고 걸어 가는 길이 아닌데 사람들이 잘못 이해 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질마는 소의 등에 얹는 ㅅ자 모양인데 양쪽면의 경사가 급해 보여서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보시면 됩니다.
마소에게는 질마가 있다면 사람에게는 지게가 있지요.
지게를 짊어진 사람이나 길마를 얹는 마소는 다같이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아 간다고 생각합니다.
질마재는 전국에 여러곳이 있습니다.
모두가 한결같이 어렵고 힘든 고갯길이며 사람이나 동물에게도 쉽지 않은 삶의 여정을 나타내는 길일겁니다.
지게는 종류도 다양하다.
나무지게,알미늄지게,바지게,등지게,물지게등 그외 많은 지게가 있을것이다.
예전에는 모두가 나무로 만들어 사용했는데 지게위에 무엇을 얹느냐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달랐을것이다.
지금은 농업 박물관이나 민속촌에만 나무로 만든 지게가 있다.
현재 몇 사람이 사용하는 지게는 가벼운 소재인 알루미늄으로 만든 지게와 철로 만든 쇠지게뿐이다.
등산 배낭이나 골프 가방 낚시 가방을 등에 졌다고 모두 지게라고 부를수는 없다.
그렇게 불러서도 안될것이다.
가난한 아버지의 영원한 동반자이기도한 우리네 삶의 무게를 두어깨에 걸린 지게만이 유일한 우리의 전통지게일것이다.
우리 모두는 선조들의 등에 걸린 지게에서 태어난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지게질도 힘들지만 지금도 두어깨 위에 멜빵을 걸고 돈벌이를 하고 있으니 내 운명의 무게는 아직도 진행형이라고 할수있다.
예초기의 무게는 비록 가볍다 할지라도 무더운 날에 하루 종일 메고 기계를 돌리는 일은 절대 쉬운일은 아니다.
저녁에 샤워후 거울을 보면 두 어깨위에 선명한 자국이 보인다.
이런 자국은 지게의 자국과 무엇이 다른가?
어깨위를 짓누르는 힘은 무거운들 가벼운들 어떻게 다르다고 할것인가?
평생에 한번도 어깨위에 무거운 짐을 올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도 부지기수 일것이다.
금수저 아니 부모 잘만나서인가?
외국 여행의 경험이 별로 없어 표현이 그런데 어느나라에는 두 어깨위에 걸머지는게 아니라 이마에 줄을 걸고 등에 무게를 분산 시키는 그런형태로 무거운 짐을 운반하고 있다.
우리말에 꾼이라는 단어가 있다.
통칭[通稱]으로 꾼에는 수많은 종류가 있디고 생각한다.
가장 많은 표현은 지겟꾼일것이다.
다음으로는 장삿꾼, 노름꾼, 낚싯꾼, 사냥꾼, 땅꾼, 사기꾼에 이어 정치꾼이라는 단어도 있으며 우리는 대부분이 일꾼에 속한다고 볼수도 있다.
그중에 가장 앞서는 지겟꾼은 수많은 꾼중에 가장 힘들어 보이기도 하며 한번 꾼이 되면 평생 동안에 꾼의 굴레에 묻혀 살수가 있기도 하다.
낚시하는 사람은 대부분이 낚싯꾼이라 부르지만 같은 맥락에서 보이는 산꾼이라는 단어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산에 오르는 사람을 산꾼이라 부르지 않고 등산객이라는 높임말을 사용하고 있다.
낚시는 할일 없는 백수나 하는 행동일것이고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오래전 부터 낚시나 하는 사람의 행동이 곱게 보일리가 없었을것이므로 객[客]보다 한단계 낮은 꾼으로 불렀을 것으로 예상해본다.
산에 오르는 사람의 모습은 부지런히 일하는 모습으로 비쳐졌거나 일단 산에 오르면 먹을것이나 땔깜을 구해오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을 것으로 예상해본다.
옛 어른들은 산에 오를때 아마도 맨몸이 아닌 지게는 필수로 지고 올랐을 것이다.
어린 나이에 공사판에 들어가 벽돌 지게를 지고 살아야 했던 흙수저의 인생 항로였으니 가슴이 아파온다.
벽돌 한장의 무게가 지금은 약 2kg이지만 1971년도 당시는 그보다 약 300g에서 500g 더 무거웠다.
평균 4~50장을 지고 날랐으니 지금은 그 무게를 상상도 하기 싫다.
거의 100kg에 육박하는 그런 삶의 무게 말이다.
지게가 원망스럽기도 하지만 그 무게 만큼 내 인생의 무게도 무거워졌으니 고맙다고 생각하며 지게를 지다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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